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힘만으로 자라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늘 존재해 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영아기에 우리의 생존을 책임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부모님’ 이시지요.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우리가 학식을 지니고 있다면, 즉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배움을 얻었다면 거기에는 교육에 헌신하신 분들도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이들을 통해서 그 힘을 얻게 됩니다.
헌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가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그분의 전능은 다른 여느 힘들에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전능이야말로 가장 막강한 힘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의 뒤를 밀어주시면 우리는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우리 역시도 불가능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악한 의도로 그분의 힘을 빌려다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어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 생활 안에서 우리는 언뜻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역할을 택해야지 더 거룩해 보인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남미 오지의 선교사는 거룩하고 대한민국에서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는 가정 주부는 그닥 거룩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나아가 열심히 열심히 기도에 헌신하는 이, 성체 조배를 다니고 매일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고 모든 수련회, 양성과정, 선교 코스 등등을 거치고, 적어도 9일 기도를 수년동안 해 온 사람은 신앙생활이 열심한 사람이고, 아이를 업고 김밥을 팔면서 동분서주 하면서도 자기 전에 잠시나마 하느님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이런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조종해 먹으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 투자하면 더 많은 이익이 배당된다는 아주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실은 이것이 율법주의의 원리였습니다. 율법을 세칙까지 철저하게 지키면 의인이고 그렇지 못하면 보통 사람, 혹은 저주받은 이들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전체를 하느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분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하느님에게 맡겨야 하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찬양하고 부유한 이들을 싸잡아 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각자는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행할 바를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오지에 보내면 오지로 가야 하고, 반대로 부유한 곳에 보내면 부유한 곳에 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바로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가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그분의 전능은 다른 여느 힘들에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전능이야말로 가장 막강한 힘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의 뒤를 밀어주시면 우리는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우리 역시도 불가능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악한 의도로 그분의 힘을 빌려다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어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 생활 안에서 우리는 언뜻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역할을 택해야지 더 거룩해 보인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남미 오지의 선교사는 거룩하고 대한민국에서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는 가정 주부는 그닥 거룩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나아가 열심히 열심히 기도에 헌신하는 이, 성체 조배를 다니고 매일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고 모든 수련회, 양성과정, 선교 코스 등등을 거치고, 적어도 9일 기도를 수년동안 해 온 사람은 신앙생활이 열심한 사람이고, 아이를 업고 김밥을 팔면서 동분서주 하면서도 자기 전에 잠시나마 하느님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이런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조종해 먹으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 투자하면 더 많은 이익이 배당된다는 아주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실은 이것이 율법주의의 원리였습니다. 율법을 세칙까지 철저하게 지키면 의인이고 그렇지 못하면 보통 사람, 혹은 저주받은 이들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전체를 하느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분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하느님에게 맡겨야 하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찬양하고 부유한 이들을 싸잡아 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각자는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행할 바를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오지에 보내면 오지로 가야 하고, 반대로 부유한 곳에 보내면 부유한 곳에 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바로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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