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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았네...

박신부는 일어섰다. 너무 힘껏 일어서는 통에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내었다. 모인 다른 사제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순간 박신부는 위압감에 주춤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발언을 시작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대성전, 과연 그게 필요한 걸까요? 사제들이 부족하다는 말도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보좌 신부가 부족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미 10년차를 넘어서는 보좌가 나오고 있는 판입니다. 부족한 건 보좌가 아닙니다. 부족한 건 우리의 선교 열의가 아닐까요?”

주변에서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젊은 놈이 뭘 안다고…’ 늙은 분이 하는 소리리라. 박신부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을 더 증축할 게 아니라 사제들을 필요한 곳에 파견해야 합니다. 관리하는 곳에는 관리에 전문화된 이들, 즉 신망있는 평신도들에게 맡기고 사제들은 사제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파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야를 넓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 교구에 사제들이 남아돈다면 이웃 교구에 파견을 하고, 우리 나라에 사제가 남아 돈다면 이웃 나라에 사제를 파견해야 합니다. 사제가 사제로서 일을 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안주하고자 사제가 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을을 다니고 또 다녔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당신의 가르침을 듣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행사를 잘 준비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가르치는 사제이어야 합니다.”

주교님의 굳게 다문 입과 대조적으로 사제단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현실감이 없다느니, 아직 젊어서 혈기가 왕성하다느니 별의 별 수근거림이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나서서 말하진 못했다. 박신부는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필요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은 이미 고착화된 사제상에 질려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열의가 없고, 독선적이고 율법적이며 심지어 세속적이기까지 한 사제상에 질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사제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거룩함의 향기가 나는 사제를 원합니다. 하느님과 가깝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제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양들의 바램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알았네. 이제 그만 하게.”

주교님이 말을 끊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감지하신 모양이었다.

“자네의 의견은 잘 알겠네. 하지만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네.”

박신부는 뒤로 밀려난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순명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바로 설 수 없다는 걸 아는 박신부였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상의 뜻이었다. 장상의 뜻 안에는 늘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으니까.

“철없다고는 하지 않겠네. 자네가 살아오는 바를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사제단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자제를 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군. 자네의 혈기가 우리를 너무 지나치게 갈라 놓기 전에 말일세.”

앉아있는 박신부의 등을 뒤의 누군가가 격려한다는 의미로 툭툭 쳤다. 박신부는 안경을 고쳐쓰고 주교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장상이라는 직분의 무게감을 말이다. 주교님이 사회를 보는 신부님에게 언질을 주셨다. 사회자 신부님이 나서서 말했다.

“대성전과 사제에 대한 문제는 추후 사제 참사 회의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다음 주제에 관한 논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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