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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

악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악하다고 부를까요? 악한 것은 왜 악한 것일까요?

일단은 ‘선’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선은 ‘하느님’과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악은 그 반대일 것입니다. 결국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모든 것.

여기에서 조금은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고착화 시키고 화석처럼 만들고는 그 하느님을 따라가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을 하면서 실제로는 악한 자들이지요.

법을 잘 지키면 선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모든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면 선할 것 같지요.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도리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의를 요하는 부분입니다.

이제 악의 문제로 다시 돌아옵시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조성되는 것일까요? 사실 모든 결함은 악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보다 실질적인 악은 오직 단 하나의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이지요.

자유가 없다면 선도 악도 없는 셈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에게 모든 것은 ‘필연’일 뿐이고 계획되고 프로그램된 것일 뿐이지요. 악은 오직 ‘자유의지’에서만 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지닌 모든 존재라면 ‘악’을 자행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악을 자행하는 순간 악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과 영적 존재들이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고 악한 영들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창조 당시에는 선한 존재였고 하느님은 악을 만드신 게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당신의 위대한 섭리 안에서 악의 탄생을 짐작하고 계셨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누가 그 악한 존재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선물받은 각자가 선택하는 셈입니다.

쓰레기가 생길 것을 예상해서 쓰레기통을 준비했다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쓰레기마저 어떻게든 재활용을 할 궁리를 하는 사람이 나쁜 게 아닙니다. 재활용 할 건덕지마저 없게 스스로를 망쳐 버리는 쓰레기가 나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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