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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자유인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에페 6,8)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모든 신분제를 철폐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만들고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헌신하셨다고 막연히 믿고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존재하는 제도를 전복하려고 노력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한 것은 불의가 사라지는 것이었지 모든 제도와 법을 깡그리 부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종과 자유인은 당시에 존재했고, 사실 지금도 형태를 바꾸었을 뿐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가면을 덮어쓰고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열려 있다고 광고하면서 안심 시키려 할 뿐이지요. 하지만 ‘신데렐라’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의 수발을 드는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면 저마다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속된 이들은 그 위치에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보다 자유로운 이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 안에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지금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에 구속되어 있는 종과 자유로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이룰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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