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에 나와있는 하느님의 약속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것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죽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물론 육신은 죽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지요. 그들은 몸을 움직이고 활동을 하지만 이미 그들의 내면은 죽은 상태입니다. 죽은 자들, 죽은 것들의 특징은 자신 안에 활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그 상태로 고정되고 주변 조건에 따라 조금씩 사그라들어 갑니다. 그것이 죽음의 진정한 의미이지요. 즉, 몸은 살아 있지만 내면이 멈춰 버려서 더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지극히 수동적으로 주변의 온갖 유혹들에 시달리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좋다는 것은 뭐든 따라하지만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막연하게 그걸 원하지만 그것의 기능도 모르고 그것이 왜 좋은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새로운 물건’이기 때문에 사야 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포털 검색창에 떠오르는 새로운 이슈에는 관심이 있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이 갈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정말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것 같지만 내면은 아주 캄캄한 사람들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이 없앨 죽음은 바로 내면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건너감’이라는 것이 뚜렷하기 때문이지요. 참된 죽음에서 해방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 죽음을 이겨 버리셨기 때문이지요.
살아있지만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지요. 그들은 몸을 움직이고 활동을 하지만 이미 그들의 내면은 죽은 상태입니다. 죽은 자들, 죽은 것들의 특징은 자신 안에 활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그 상태로 고정되고 주변 조건에 따라 조금씩 사그라들어 갑니다. 그것이 죽음의 진정한 의미이지요. 즉, 몸은 살아 있지만 내면이 멈춰 버려서 더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지극히 수동적으로 주변의 온갖 유혹들에 시달리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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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하느님이 없앨 죽음은 바로 내면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건너감’이라는 것이 뚜렷하기 때문이지요. 참된 죽음에서 해방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 죽음을 이겨 버리셨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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