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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사먹기

아이스크림을 사온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먼저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고, 이어서 아이스크림에 대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오기 위한 준비(동전, 외출할 준비)를 갖추게 되지요. 그리고 일어나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최종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게 되지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간주하였을 때에, 우리는 먼저 그 첫 아이스크림에 대한 인식처럼 하나의 공통된 인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그분에 대한 욕구,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인식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입니다.

1) 인식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물론 하찮은 피조물이 하느님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낱낱이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한계성은 무한하신 분을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작은 컵에다가 바닷물을 담겠다는 어리석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릇된 오해들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예 인식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어렵다 그러니 아예 시작을 말자는 건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요. 하느님에 대해서 신경을 쓰느니 차라리 돈이라도 좀 더 벌겠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통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얕은 지식과 흥미 수준에서 머물고 말 뿐이지요.

2) 필요
하느님을 어느정도 인식한다고는 하지만 그분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육체적 쾌락 가운데에서 길을 잃는 것이지요. 배부른 사람은 빵을 더는 찾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육적인 쾌락과 그것을 채우는 데에 급급한 이들은 영적인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영혼의 목마름과 영적인 공허를 느끼려면 잠시라도 짬이 필요한데 이들의 내면은 다른 것들로 꽉꽉 들어차 있지요. 새로나온 휴대폰은 간절히 원하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려는 열망은 없는 이들입니다.

3) 준비
필요를 느낀다면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될 대로 되겠지라는 생각, 아니면 최소한의 율법 준수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은 길고 험난합니다. 오늘날의 세상, 유혹이 많고 사람들의 시선이 갈수록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와중에서는 더욱 준비가 필요한데도 사람들은 준비는 커녕 스스로 충분하다고 자족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조용할 때에는 신앙생활 비슷하게 하다가 조금이라도 시련이 닥치면 당장 신앙부터 내던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들은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이들입니다.

4) 실행
준비를 갖추었다면 그것을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칼을 갈아도 요리를 하지 않는다면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는 현장 실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실천에 있어서 사람들은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수많은 과정을 듣고, 피정에 참여하고 신학 강좌를 듣지만 정작 삶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뭐가 대신 일어나 주기만을 앉아서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이론은 완벽하지만 하나도 진보가 없는 이들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쉽게 분리해 놓았지만, 사실 떨어져 있는 순서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이스크림을 그냥 사 먹지요.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론은 이론일 뿐입니다. 모든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이론도 이론일 뿐이지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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