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 자체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세대가 있고 선한 세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악한 세대의 시대라는 것이지요.
악과 선의 차이는 규정 준수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악과 선의 차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수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왜냐면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악한 세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이야기하면 당장에 그 ‘증거’, 또는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선한 세대였다면 하느님은 당연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다만 우리가 그분을 더 잘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우리의 악함은 현대, 즉, 20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더욱 극심해졌을 뿐입니다. 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느님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기술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을 야만적이고 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마치 지금의 미국 사람들이 인디언들의 생활 방식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인디언들이 오히려 더 자연과 더불어 살고 삶의 지혜가 충만했던 것과 비슷한 셈입니다.
차를 굴리고, 스마트폰을 쓰고, 온갖 문명의 편의를 누리면 ‘상위의 문명권’에 속하고, 그런 기술적 편의가 떨어지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우리 안에 뿌리 박혀 있고,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지요. 지금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를 못하지요. 오히려 암을 치유하기 위해 기술 개발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더 많은 셈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선한 세대에서는 때로 드러나는 악한 이들을 설득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면 악한 세대에서는 주된 흐름이 악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남은 선한 이들을 구해 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과제일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초대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정치적인 메세지, 기술 과학적인 메세지에 더욱 귀를 열고 있을까요?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 과연 새로나온 스마트폰에 대한 관심 정도나 될까요?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안들에 하느님 중심의 분별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제가 바라보는 적지 않은 이들은 언뜻 선한 사람인 척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더욱 증오에 불타고 분노에 휩싸여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셈이지요.
악과 선의 차이는 규정 준수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악과 선의 차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수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왜냐면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악한 세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이야기하면 당장에 그 ‘증거’, 또는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선한 세대였다면 하느님은 당연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다만 우리가 그분을 더 잘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우리의 악함은 현대, 즉, 20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더욱 극심해졌을 뿐입니다. 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느님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기술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을 야만적이고 저능하다고 생각하지요. 마치 지금의 미국 사람들이 인디언들의 생활 방식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인디언들이 오히려 더 자연과 더불어 살고 삶의 지혜가 충만했던 것과 비슷한 셈입니다.
차를 굴리고, 스마트폰을 쓰고, 온갖 문명의 편의를 누리면 ‘상위의 문명권’에 속하고, 그런 기술적 편의가 떨어지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우리 안에 뿌리 박혀 있고,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지요. 지금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를 못하지요. 오히려 암을 치유하기 위해 기술 개발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더 많은 셈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선한 세대에서는 때로 드러나는 악한 이들을 설득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면 악한 세대에서는 주된 흐름이 악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남은 선한 이들을 구해 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과제일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초대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정치적인 메세지, 기술 과학적인 메세지에 더욱 귀를 열고 있을까요?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 과연 새로나온 스마트폰에 대한 관심 정도나 될까요?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안들에 하느님 중심의 분별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제가 바라보는 적지 않은 이들은 언뜻 선한 사람인 척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더욱 증오에 불타고 분노에 휩싸여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셈이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