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고통이 모두 똑같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고통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 나은 영광을 위한 고통이 있고, 악을 피하게 하는 고통이 있고,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고통도 있습니다.
먼저 자연스러운 고통은 우리 삶 안에서 찾아오는 여러가지 종류의 자연적인 고통입니다. 몸이 늙어가는 것이나 주름이 늘어가는 것, 아이가 걷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 그리고 때로 다가오는 자연재해와 같은 넓은 의미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는 때가 되거나 그런 고통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감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악을 피하게 하는 고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다 들통이 나서 혼이 나면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은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고통입니다. 철없는 아이가 불에 한 번 데이고 나면 다시 그런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고통이지요.
영광에 이르는 고통은 더 나은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입니다. 그 누구도 성당에 와서 봉사하라고 의무지워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의 동의로 봉사를 할 때에 그 영광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돌아오지 않더라도 영원 안에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는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고통이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나, 본당 주임 신부님의 눈치를 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주임 신부님의 칭찬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아버린 고통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고통의 종류를 따지고 들어도 고통의 본질적인 특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싫은 것이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기타를 처음 배울 때에는 부드러운 손 끝과 마주치는 그 강한 기타줄에 강렬한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손 끝에 굳은 살이 배기면서 이제 기타줄을 잡는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도 인내를 통해 견디어 내면 그 뒤에 다가오는 작은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됩니다. 처음 이웃을 향한 봉사는 큰 짐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과 비슷하지요.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은 언뜻 엄청난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자기 고통에 대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지요. 이러한 이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겪는다고 토로하는 고통의 무게는 실제로는 얼마 안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고통을 겪는 이는 표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설령 표현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리도 만무하기 때문에 소용없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고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고통의 무게를 사람들은 짐작할 수 없을 뿐이지요.
예수님은 공생활 시작부터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의 잔에 대해서 일찍부터 알고 계셨지만, 아이들은 천진 난만하게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안기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 가운데 고통을 지니고 가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그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자연스러운 고통은 우리 삶 안에서 찾아오는 여러가지 종류의 자연적인 고통입니다. 몸이 늙어가는 것이나 주름이 늘어가는 것, 아이가 걷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 그리고 때로 다가오는 자연재해와 같은 넓은 의미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는 때가 되거나 그런 고통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감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악을 피하게 하는 고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다 들통이 나서 혼이 나면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은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고통입니다. 철없는 아이가 불에 한 번 데이고 나면 다시 그런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고통이지요.
영광에 이르는 고통은 더 나은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입니다. 그 누구도 성당에 와서 봉사하라고 의무지워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의 동의로 봉사를 할 때에 그 영광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돌아오지 않더라도 영원 안에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는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고통이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나, 본당 주임 신부님의 눈치를 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주임 신부님의 칭찬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아버린 고통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고통의 종류를 따지고 들어도 고통의 본질적인 특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싫은 것이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기타를 처음 배울 때에는 부드러운 손 끝과 마주치는 그 강한 기타줄에 강렬한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손 끝에 굳은 살이 배기면서 이제 기타줄을 잡는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도 인내를 통해 견디어 내면 그 뒤에 다가오는 작은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됩니다. 처음 이웃을 향한 봉사는 큰 짐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과 비슷하지요.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은 언뜻 엄청난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자기 고통에 대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지요. 이러한 이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겪는다고 토로하는 고통의 무게는 실제로는 얼마 안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고통을 겪는 이는 표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설령 표현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리도 만무하기 때문에 소용없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고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고통의 무게를 사람들은 짐작할 수 없을 뿐이지요.
예수님은 공생활 시작부터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의 잔에 대해서 일찍부터 알고 계셨지만, 아이들은 천진 난만하게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안기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 가운데 고통을 지니고 가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그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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