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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돈

주일 두번째 미사를 마치고 교사 모임을 위해서 나오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한 교사가 다가오더니 문제가 좀 생겼답니다. 첫영성체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돈을 잃었는데 그 바로 옆에 다른 학생 엄마가 있었답니다. 헌데 돈은 사라졌고 분명 그 자매가 돈을 가져간 것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자매는 죽어도 아니라고 한답니다.

“무슨 일이죠?”
“제가 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가 200Bs.가 들어있던 것이 빠지는 걸 미처 알지 못했어요. 헌데 나중에 찾아보니 돈이 사라진 거에요. 근데 한 아주머니가 이 자매가 돈을 집어드는 걸 봤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먼저 그 돈을 잃었다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자 상황을 정돈해 봅시다. 돈이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사라진 건 분명한데 이 자매님은 옆에 있었는데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는 거지요. 근데 돈을 잃은 여러분들은 이 자매가 돈을 가져가는 걸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아줌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아직은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는 거네요. 그 자매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돈이 어디 다른 구석에 밀려 들어갔을 수도 있구요.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음 주에 그 자매님과 함께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요. 그때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둬야 할 건 있어요. 우린 가톨릭 신자예요.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행여라도 누군가가 그 돈을 주인의 허락 없이 들고 갔다면 그의 양심은 어둠에 휩싸일테고 그의 영혼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건 맞는 거죠? 그 부분에 다들 동의 하십니까?”

돈을 잃어버린 부모야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고 그 자매도 마지못해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매의 흔들리는 감정을 놓치지 않았지요.

“좋습니다. 그럼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 주에 그 증언을 했다는 자매를 찾아서 함께 모이도록 해요.”

제 돈을 꺼내서 돈을 잃었다는 부모에게 주고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나중에 그 방법으로 돈을 얻어 보려는 부모가 생길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일차적인 결론이 나겠지요. 그리고 그때에도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 돈을 잃은 부모를 도와줄 생각입니다.

없이 산다고 모두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오직 탐욕스런 마음에서 생겨나고 이는 가난하건 부자이건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만일 어느 의사가 사람을 살릴 목적으로 참된 의술을 펼치지 않고 돈을 벌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될 의술을 권한다면 그 역시도 탐욕스런 사람이고 일종의 ‘도둑질’에 가담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순간적인 유혹으로 집어든 돈으로 여러가지를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돈은 ‘더러운 돈’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수단으로 벌어들인 돈은 촉매제가 되어서 한 사람의 삶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돈은 반드시 어둠의 결과를 몰고 옵니다.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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