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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 -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여기서 사탄으로 호칭되는 이는 다름 아니라 지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을 맡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즉, 그가 교황이든 주교든 뭐든 간에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순간 사탄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말이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잘 알고 계셨고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베드로가 보다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나머지 제자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베드로가 실제로 사탄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늘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갈까요?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행사들의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일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들이 하느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사람들을 열심히 모으지만 그렇게 해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모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이 없는 외적이고 가식적인 수많은 선교 활동들, 사람들을 초대해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전하고 서로 간의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목적이기 보다 단순히 기금을 끌어 모으려는 것이 목적인 수많은 행사들, 이런 저런 인간적이기만 한 모습 속에서 교회는 그 가야할 길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은 인간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고 그 ‘인간적’인 모든 일들은 결국 사탄의 수중에서 놀아나게 됩니다.

오직 하느님을 진실되이 사랑하는 자만이 모든 일의 진실한 의미를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가장 위대해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도 지나가 버리는 먼지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길가의 풀꽃을 보고 즐기더라도 그 시간이 영원에 맞닿아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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