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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든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네비게이션 안에 프로그램이 무엇이 들었는가에 따라서 길을 가르쳐주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길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없고 전혀 엉뚱한 지시를 하기 시작한다면 차를 운전하는 이는 그걸 참조하다가 큰 사고를 당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돈’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정립해 나갑니다. 물론 ‘돈’이 핵심은 아닙니다. 인간이 왜 그렇게 돈을 필요로 하는지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돈이 필요한 이유는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남는다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존이 될 수도 있고 그 밖의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육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생존의 차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남고자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찾고자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든 내 생명이 머무는 동안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마치 내가 아무것도 아닌 듯한 취급을 실제로 당하고 무시당하고 천시 당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입니다.

헌데, 과연 우리가 살리고자 애를 쓰는, 우리가 일으키고자 애를 쓰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기를 쓰고 살려놓는다고 한 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사실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는 이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심코 살아가는 것이지요. 뭔가 마음이 허전하긴 한데 단순히 뭔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의 ‘즐길 거리’를 찾아서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이 시작되는 생활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그 본질에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참 하느님을 얻어 만나기 전까지 공허함을 느끼도록 되어 있지요. 헌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공허를 메꾸기 위해서 하느님 아닌 것을 대상으로 시도를 하고 있지요.

그렇게 잔뜩 교만해지고 부풀려져서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체험하면서 공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하느님 없이는 ‘허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제 아무리 자신을 가꾸고 아름답게 꾸며본 들 소용없는 짓인 셈입니다. 공허한 마음은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변덕스런 이들과의 한때의 수다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며, 블록 버스터 영화로도 채워지지 못하고, 멋진 여행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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