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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기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9)

고기는 낚아서 먹거나 어시장에 내다 팝니다. 사람은 낚아서 무엇할까요? 사람이 낚이고 나면 엉뚱한 이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여야 할 곳에 모이게 됩니다.

사람이 낚인다는 의미는 그의 영혼을 모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관심 가지는 곳에 마음을 두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은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그 영혼을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낚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쓰는 그물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거기에 모여드는 이를 낚는 것이지요. 이는 참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것을 수단으로 사람을 낚게 되면 그 관심사가 사라질 때에 마음도 흐트러지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세상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수도원 안에서도 일어나게 되지요. 우리는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낚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낚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모든 고기는 그물질의 대상이 되지만 모두가 그물 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초대가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하늘 나라를 선택하고 그 길을 걷는 이는 생각처럼 많지 않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것은 과욕입니다. 모두가 복음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이를 박해하는 사람, 관심을 가지다가 포기하는 사람 등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우리의 특권입니다. 나머지는 그저 복음을 전해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이는 주님의 사명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특권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기쁘게 이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이에게 특별히 ‘두려워하지 말라’고 친히 위로를 해 주시기도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이 일은 특권이고 기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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