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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영원에서 되받다

부유한 이들에게 잘 해주면 그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으로 되갚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뇌물을 바치는 이들이 있고 권력가에게 알랑방구를 뀌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권력가를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위치가 뒤바뀔 때에 그들은 가차없이 냉혹하게 변해 버릴 것입니다. 이는 선거 전의 정치인과 선거 후의 정치인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현세에서 그 어떤 것도 보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되갚아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것들에는 욕심이 없지만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스럽지 않지만 진정한 것을 탐내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현세 생활에서 이를 적용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가난한 이들이 무턱대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참된 가난이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겸허한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가난한 이들 가운데 교만한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이용당해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영혼이 가난한 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영적인 재화를 나누어주는 것이 참된 나눔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

히브리서는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를 묘사합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이라는 미명 하에 선택된 이들, 구원받은 이들이 갈 곳을 묘사하고 그 전에 심판받은 이들이 가게 될 곳을 묘사합니다. 먼저 심판받은 이들이 갈 곳을 잘 살펴보면 그곳은 부정적이고 어둡고 나팔로 대변되는 불안이 가득하고 긴장감이 가득한 곳이며 그들을 인도하거나 위로해 줄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이는 영적인 이미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심한 괴로움에 싸여 있을 때에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영혼에 죄책감이 가득할 때에 그 영혼 자체는 불에 타오르는 듯이 괴롭고 길을 찾지 못해 짙은 어둠에 시달리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격한 폭풍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고발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고 그나마 우리가 들어야 하는 진리로 인도하는 말은 우리 스스로가 거부해서 그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양심이 어두울 때에 우리는 더욱 성경과 미사와 고해성사를 멀리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기회들을 거부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가는 곳은 말 그대로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수많은 천사와 구원받은 이들, 즉 내면이 온순하고 선하며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늘 주인으로 모시는 하느님께서 심판자로 계시고, 자신의 작은 오류가 모두 치유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 속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말을 물리치고 의인들은 격언을 신중히 되새길 뿐입니다.

비가 내리다

비는 하늘에서 골고루 떨어지지만 일단 땅에 닿고 나면 나아가는 방향은 뚜렷합니다. 비는 높은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비는 낮은 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모이고 모여 그곳에 고여 넓은 호수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은총을 쏟아부어 그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나약함이나 무능함이 아닙니다. 겸손은 그저 삼가기만 하고 착한 척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진정한 겸손은 당신이 시키는 일을 용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받고 그 소명을 적극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반면 교만, 거만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의지를 가장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귀는 순하지 않으며 이들은 진리를 들어도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이런 이들이 세상 안에서는 오히려 사랑받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람을 분류해서 이득이 될 만한 사람 앞에서 알랑방구를 뀌는 것을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뜻 외부에서 보면 그들이 잘 사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은 내면에 거만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은총을 배제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마치 비가 머무르기 위해서는 낮은 곳이 필요한데 이들의 영혼 속 자리는 높은 곳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은총을 자연스럽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영리함을 믿을 뿐 은총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결국 메말라가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는 영혼은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향유하더라도 결국에는 텅 빈 삶이 되고 맙니다.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격언을 되새기고 살아가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 늘 깨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 당신...

허영이 악의를 만날 때

우리는 '시너지'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두 개 이상의 것이 하나가 되어 독립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낼 때에 쓰는 말입니다. 헌데 이는 악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의도는 언제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악을 구체화 시켜줄 다른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다른 악을 지닌 이들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날 사기 사건이 많습니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기를 치려는 악한 의도를 지닌 이의 마음이 정당한 것 이상을 원하는 욕심이 있는 마음을 만나서 사기가 완성되는 셈입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오히려 남을 돕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사기에 연루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범죄에 연루되기는 힘듭니다. 공연히 술집이나 디스코텍 같은 곳에 가게 되면 범죄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헤로디아의 '살의'는 그 여성의 내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한 의도가 헤로데의 허영을 만나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헤로데는 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엉뚱한 약속을 했고 이는 결국 세례자 요한을 살해하는 데에 적극적인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구들을 올바로 성찰하지 않으면 악마는 그 작은 엇나감을 빌미로 우리를 구렁텅이에 넣어 버릴 수 있는 더러운 계획을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매들끼리 모여서 뒷담화를 하다가는 그 안에서 더 큰 악을 만날 뿐입니다. 형제들끼리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건강도 상하고 음주운전에 불륜과 같은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는 것이 일상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선이 은총을 만나 더 풍부한 선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고 그분의 은총을 목말라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덤을 만들고 묘를 꾸미다

죽은 것을 치장하고 그것으로 관광 상품을 만들어 냅니다. 그 자체가 그들, 즉 순교자와 예언자의 영성을 배우거나 살아있는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추종하는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더 큰 건물, 더 큰 성지를 조성하고 더 많은 부를 끌어들이고 그것을 유지해야 하는 환경은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행동 자체가 예언자들을 거부하고 죽이는 활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내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요.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사소한 손해조차도 견뎌내지 못하는 그들이 예언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화를 낼 지는 뻔한 일입니다. 현대의 교회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화려한 건물에 감탄하고 값비싼 프로젝트에 환호하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신심은 겉꾸며진 활동들로 바뀌어 버리고 거창한 일들을 치루어 내었으니 자신들은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부심을 가집니다. 단순히 성경을 많은 횟수로 읽어서 거룩해 질 것 같으면 성경을 교정한다고 수차례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아서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시골 촌로가 더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툭하면 박물관을 만들고 썩어 문드러질 것들을 집어 넣어 두고서는 마치 그것으로 당대에 살던 이들의 거룩함을 잡아 넣기라도 했다는 식의 태도가 바로 스스로가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사람들의 허영이 살아있는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증언하고 그런 허황된 이들의 손에 조용히 죽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 그들은 환호 속에 들여높여질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올바르지 않은 설교의 종류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설교 -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이들이 하는 설교입니다. 하느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린다거나 하느님을 만물에 통용되는 에너지와 같은 식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곡해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설교 - 언뜻 겉으로는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주로는 재화, 권력, 명예)을 가지고 하는 설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결국 더 많은 돈을 내게 만들거나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목적을 지니거나 권력층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하는 식입니다. 속임수로 하는 설교 - 삶의 진리를 가리고 사람들에게 헛된 환상을 심어주는 설교입니다. 지나치게 기적이나 이적 따위에 사로잡히게 해서 우리의 실존적 문제를 도외시하게 만들어 버리고 사람들을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게 만드는 설교입니다. 참된 설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는 강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강론입니다. 아첨을 하거나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을 찾지 않는 강론이어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하는 사목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목자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명령하고 밀어붙이는 식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목자는 사목 대상자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하며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고자 애를 써야 하고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도 바쳐야 합니다. 이런 사목자의 노력을 하느님은 아십니다. 올바른 사목자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겸손하게 처신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좁은 문

성경은 꾸준하게 신앙의 본질을 다루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꾸준하게 왜곡시키고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사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구원이고 행복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에 어마어마한 조건을 붙이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면서 실상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들을 '불의를 일삼는 자들'로 규정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현실입니다. 과거부터 교회 안에는 자신이 정한 구원의 규정을 준수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러한 규정들이 보편화되어 본질을 상실한 교회가 되어 버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의로움'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의로움이 보다 참된 의로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몸을 해치고 있다면 더 큰 범주에서 그것은 나쁜 일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바라시는 것을 해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적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구원'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 질문을 하는 이가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구원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가 정해놓은 규정과 규범을 모조리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대답에 답변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만 좁을 뿐입니다. 그 문이 어디있는지 알고 그 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아는 ...

훈육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육체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구보하고 낮에 주특기 훈련을 빡세게 하고 틈만 나면 체력 보강을 위한 여러 작업을 시키면 됩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갈 때 쯤이면 군인은 제대를 합니다. 영혼은 어떻게 훈련시킬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하기 싫은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지만 커피를 싫어하는 이에게 커피를 마시게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세상에서 어떻게든 수많은 것을 얻고 누리기를 원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사랑하는 영원한 나라를 눈앞에 두고 어쩔 수 없이 견디고 버텨야 하는 공간이 세상이 됩니다. 미숙한 이들에게는 초보적인 훈육이, 고차원적인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훈육이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에게 우리를 내어맡길 때에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훈육을 선물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그분이 주시는 것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겸손한 순명입니다. 

살아남은 자들

이 짧은 표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는 살아남는 길이있고 살아남지 못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진영으로 병사들이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죽어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또 아직 돌아오지 않다가 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일찍 들어왔는데 죽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진영으로 들어오는지 아닌지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살아남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력은 무엇일까요? 이미 질문 안에 답이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력은 '믿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생명을 품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모두가 생명력, 즉 믿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아직 교회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생명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모든 살아남은 이들을 모으기를 바라십니다. 여전히 믿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을 모아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선교 위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가 어떤 가정을 언급하면서 한 번 가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분은 처음에는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집에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있어서 제가 찾아가 축복을 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문자가 왔습니다. 그 집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제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한계를 표현하고 그 뒤에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분들 안에는 생명력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생명력을 바탕으로 바깥으로 나가서 아직 하느님에 대해서 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훗날 당신의 뜻에 충실했던 이들을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

불타오르다

성경은 '불'이라는 상징을 자주 사용합니다. 불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그대로 태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이 태우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불은 종이나 나무는 태우지만 금속은 태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금속은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불은 둘 사이를 가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불순물을 태워 버리고 보다 순수한 귀금속을 더욱 깨끗하게 정련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당연히 영혼의 불입니다. 영혼의 불이 의미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영혼은 순수한 사랑을 만나면 더욱 불타오르지만 어떤 영혼은 순수한 사랑을 만나면 그것을 거부하고 외면합니다. 언뜻 듣기에 '사랑이면 다 좋은 것 아닌가? 그걸 왜 거부하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순수한 사랑을 즐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사랑을 추구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내가 자신이 허영과 탐욕에 사로잡혀 친구들 앞에서 자랑할 값비싼 핸드백을 사달라고 남편에게 떼를 쓰면 남편은 순수한 사랑으로 아내가 더 잘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하는 일은 우리 가정의 경제 사정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아내의 마음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남편을 증오하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일은 세상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갈라섬'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더러 서로 다투도록 종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 앞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 자녀들의 신앙 상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그 젊은 나이에도 신앙의 순수성을 굳게 쥐고 열심히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신앙을 던져 버리고 각자의 세속적인 삶에 열중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그 불이 한껏 타오르길 바랍니다.

죄에 맞서 싸우다

신앙생활은 쉽고 편한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죄에 맞서 싸우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영혼은 너무나도 쉽게 육체의 안녕에 굴복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안녕과 더불어서 영혼의 갈망 마저도 잠재우려는 힘에 쉽게 굴복당합니다. 그것을 유혹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를 견뎌내어야 하고 이겨내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유혹당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죄가 무엇인지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눈을 가리고 적과 싸우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싸우려는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디에다 칼을 휘둘러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대의 신앙 경향은 교묘하게 우리를 다시 과거의 율법주의로 끌어들이기 좋은 환경으로 이끌어갑니다. 법적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신앙생활, 기도의 횟수를 헤아려 그것을 늘려 나가면서 마치 스스로가 거룩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지하게 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우리를 엉뚱한 신앙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히려 내면의 교만이 성장하고 거룩하다고 하는 일들이 우리를 오히려 더 죄스런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희망을 가지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를 죽이는 이들, 예언자를 살리는 사람

예언자는 이상한 헛소리를 해 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몇몇 예언자들을 만나지만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직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언자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은 사실상 예언자인 셈입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두 가지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예언하는 입을 틀어막으려는 세력입니다. 술에 찌든 이들에게 '절제'를 가르치면 그들은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를 사회에서 축출하거나 가능하다면 죽여 없애 버리려고도 할 것입니다. 저마다의 죄가 큰 만큼 그 죄에서 돌이키려는 사람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죄가 없으면 선을 말하는 이의 말이 거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의 말은 거북하게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주변에는 언제나 예언자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예언자를 돕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언자의 말이 진실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들은 선과 악을 올바로 식별하고 있으며 악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표현할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언자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구원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이 예언자를 구속하는 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외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더러운 수렁에서 꺼내 주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워 주시고,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