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근본 '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죄일까요?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러 이러한 것이 죄라고 하니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주일 미사 빠지면 죄라고 하니 그게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죄의 근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라고 생각하고 죄가 아닌 것도 죄라고 생각하는 셈이지요.


빛과 어둠을 가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태양은 빛입니다. 반대로 태양이 사라지면 어둠이 시작되지요. 하지만 이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와 빛이 비치면 이건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태양보다 어두우니 어둠이 될 수도 있고 밤보다 밝으니 빛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복잡합니다. 원래는 복잡하지 않은데 인간이 복잡한지라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십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명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선한 분은 아버지 한 분 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10,18) 그렇다면 선은 분명합니다. 선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선'은 하느님께 다가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반대의 방향과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모두 죄스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방향성과 움직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분류하는 '죄인들'보다 상당히 우위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 생활 속에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서는 답이 갈립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극단적으로 고수하려고 드는 율법의 형식 속에서 하느님이 의도하는 것에서 도로 멀어질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일어납니다. 현대에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전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례적인 것을 잘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전례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전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례가 근원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무시하고 전례 규정 그 자체에 집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초 간격을 몇 센티로 할 것인가를 두고 형제들이 서로 다투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현재의 삶이 죄스런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방향이 하느님이 아닌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그들이 율법을 거슬러 행동한다고 비난하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선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의도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은 여전히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 세상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요원한 설명일 뿐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