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겪는 것은 분명한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전에 있을 때에 갑자기 배에 통증이 와서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에게 생생합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몸을 지배하고 다른 일체의 활동을 막아 버립니다.
하지만 고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면으로도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척 당하고 배신 당하고 배반 당할 때에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했는데 도리어 그들이 투서를 넣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들은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진짜 고통은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모든 근원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건 정신이건 고통을 겪을 때에 그 근본에는 '죽음의 위협'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실제로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육체의 중한 질병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최근에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즉,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시달려 온 것에서 일순간에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다가 갑자기 빵으로 식사를 바꾸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늘 익숙해져 온 삶의 위협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과 탈출구를 찾아 헤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지닌 사람들, 성경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 달리 말하면 세상에만 희망을 두는 자들의 시선에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도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고 저 세상에서도 달리 얻는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사람들은 사제의 삶이 이래서 좋다 저래서 좋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자녀를 절대로 그 길에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좋은 것이다 말은 하지만 실제 그들은 삶에서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 세상을 선택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신앙은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르칠' 뿐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묵묵히 가르칠 뿐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그보다 영원한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을 믿고 다시 세상에 전할 뿐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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