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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인 분별

세상 일은 절대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닌거다. 행여 내가 큰 병을 얻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고 치자. 사람들은 한 편으로, "아이구, 저 거룩한 신부님이 저런 병을 얻었을꼬? 분명 주님의 고통을 나누어 받는 것이겠지." 또 다른 한 편으로, "뭔 죄를 그래 마이 지었겠노? 소문이 흉흉하던데... 하는 거 보이 그렇더마는." 이라고 저마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어떻게 분별해 낼 것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변덕스럽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기 쉽상이다. 겉으로 선해 보이는 일도 사실 속으로는 시궁창보다 더 지저분한 마음일 수 있고, 겉으로 심해 보이는 일도 내면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보화가 되는 것일수도 있다. 그런 고로 사람들의 분별은 중요치 않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때 유행이었지만, 그릇된 칭찬은 엇나간 길을 가고 있는 이에게 오히려 교만을 강화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대해 좋게 말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수양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엇나가는 형제에게 충고해 주는 것도 내가 그저 싫어서가 아니라 그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내가 하느님 앞에 바로서기 위해서 이어야 한다. 또 타인이 나를 칭찬할 때에 감사히 받아들이되 절대로 자신의 위치를 높일 필요도 없고 타인의 비난을 받더라도 그 말이 정당하면 받아들여 나를 고치고 그렇지 않고 막연한 비난이면 하느님 앞에 곧게 서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변덕스럽다.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내일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만들수도 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싶으면, 하느님 앞에 고요히 서 있는 스스로를 살피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당신은 '겸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르심

한국 매일미사 연중 34주 금요일 복음을 읽고 미사에 들어갔다가 오늘이 안드레아 축일이라 복음이 달라져 있는 걸 미사 직전까지 몰랐다. 살짝 당황했음. ㅎㅎㅎ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을 담은 복음인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게 있을 때에는 그 기회를 잡습니다. 늘 좋은 음식을 찾는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좋은 음식을 파는 곳을 알게 되면 거기에 가려고 기를 쓰죠. 좋은 향수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내의 모든 향수가게를 뒤져 자신이 찾던 향수가 있으면 기어코 사고 말지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늘 유지하고 있었지만 늘 마음 속에 뭔가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배도, 그물도,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족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예수님을 얻어만나 그분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선택에서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주 엉망인 남편과 사는 아내가 있습니다. 늘 술에 취하고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세상의 논리 대로라면 당장 헤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아내의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품고 이 남편을 인내하고 살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자신의 성화의 길을 걷는 셈입니다. 굳이 이런 심한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아주 자잘한 것부터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어느 택시 운전수는 손님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해 오다가 이제는 손님들을 '예수님 모시듯이' 합니다. 이전까지는 옷차림이 남루하고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손님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

남미 교회의 현주소

주임 신부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갖은 경우의 사람들이 다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영신사정을 구하려고 찾아오는 이는 거의 0%에 가깝습니다. 거의는 교회와 연관된 행정적인 문제로 찾아옵니다. 심지어는 세례를 원해도 이상한 케이스들만 들고 찾아오기 일쑤입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전반적으로 일해왔다는 걸 반증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들의 사정을 돕되 그들의 양심에 엇나지 않게 하도록 하는 것 뿐입니다. 이들에게 세례가 갖는 의미는 주민등록에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혼배에도 온갖 미신적 요소가 결합되어 날짜를 정해야 하고 적어도 홀수해는 피하고자 합니다. 이런 저런 껍데기 신앙들 속에서 진정한 빛을 찾는 이가 아쉽습니다,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우물가에서 이방 여인에게 '목이 마르다'고 하신 모양입니다. 이들의 관심을 하느님께로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미 교회는 언제까지 이런 행정적인 문제로 적지않은 시간을 신자들과 씨름해야 하는걸까요? 한편의 교회 자체의 각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걸까요?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교계제도는 그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자성 속에서 사제로서의 제 역할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거룩함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먹여 주어야지요. 즉, 거룩함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제들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합니다. 즉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살펴 신자들이 바라보기에 거룩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나도 사람인데'라는 말로 자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신자분들도 이런 움직임에 발맞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를 이상한 취미생활의 동료로...

달란트

달란트 오늘 내 영적 자녀 하나가, 달란트에 대해서 물어왔다. 기왕 답변을 한 김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은 없지만 달란트는 고대의 화폐 단위였다. 성경 안에서는 어느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영어의 탤런트에 해당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재주' 정도랄까? 남들이 갖지 못한 나의 고유한 재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거고,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도 많이 쓰인다. 누군가가 '야, 넌 달란트가 대단하네'라고 했을 적에, 이 의미는 가진 재주가 많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이런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다시 복음의 달란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5개의 달란트를 받은 종, 2개를 받은 종, 1개를 받은 종. 헌데 많이 받은 종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배를 불려 놓았다. 하지만 하나만 받은 종은 그걸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주인 앞에 내어놓았다. 주인의 말에 주목하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과연 이 달란트가 무엇일진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늘려야 한다는 것인가? 달란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인 삶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 속에 내재된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둠에 물들이지 않고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10계명을 어기지 않으려는 노력,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 큰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가 받은 영혼의 생명이 100%이라면,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 100%을 크게 해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는 노력,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의 노력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이 생명을 늘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연중34주 목요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를 하시면서 그 날이 다가와서 온갖 징조가 보이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인즉슨, 평소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이라는 말입니다. 이 낮아짐의 신비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높아지려 하다보니 서로들을 미워합니다. 그만 내가 낮아지면 세상이 조용할텐데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둥대다보니까 평소부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쳐들어 키재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가졌다." "내가 너보다 신분이 높다."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 이런 비교들은 결국 "내가 너보다", 즉 나와 네가 다르다는 걸 전제합니다. 서로 달라지려는 공동체가 하나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형제들이고 서로 도우라고 이 땅에 모여 살아갑니다.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겸손되이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이 다가왔을 때에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아멘.

미움이 좋아서 미워함

미움이 좋아서 미워함 자기가 싫은 걸 계속하는 사람은 없다.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는 게 너무너무 싫은데 자기 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고 있다면 당장 그 일을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게 될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미워할 수 밖에 없어.'라고 한다면, 그는 사실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 것'일 뿐이다. 미움이 정말 싫다면 그치고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증오를 한껏 발휘하면서 본인 스스로는 나름대로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 마음 속으로는 가장 근사한 복수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그가 던져오는 호의를 과감하게 무시한다던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분명 자신의 증오를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드러내면서도 자기 딴에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한 일은 없다면서 스스로를 '인내심 많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위선자다. 미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미움'이 좋은거다. 그게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라. 나는 사랑이 좋아서, 다시 사랑할 방법을 찾으련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할 것이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하찮은 나의 성취욕 때문에 미움을 당하지는 마십시오. 세상 것들로 인해서 미움을 당하면 우리가 받을 상급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하십시오. 누군가 다른 이를 '미워할' 때에는 공격받았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타인에게 '공격'이 될 때에는 그들이 '어둠'을 지니고 있을 때 뿐입니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이름은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진리'이고 '사랑'입니다. 서로를 갈라놓는 이들, 남을 험담하는 이들앞에 놓인 예수님의 이름은 그들에게 '쌍날칼'이 됩니다. 타인을 비난하는 이들, 하느님 앞에 자신의 허무를 모르고 교만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그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게 됩니다. 늘 마음 속에 예수님을 간직하고 정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오직 이웃의 어둠만이 우리를 증오하게 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