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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죽음

부활에 대한 희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상응한다. 즉 부활을 더 크게 희망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드는 셈이다. 결국 '죽음'이란 우리에게 있어 좋은 척도가 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곱씹어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 막연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현세의 모든 일을 허겁지겁 처리해 나간다. 하지만 이미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무덤덤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먼저 모범을 보인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 걸어간 오솔길을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 앞에서 코웃음을 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우리의 온 존재를 들어높일 때가 다가올 것이다.

오늘도 한 걸음...

가만히 앉아서 내가 만나게 될 신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본당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 들, 결국 마지막 선택은 각자에게 달린 셈이다. 사제는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줄 뿐이다. 하지만 결국 내 모든 일은 마치 '실패'처럼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재물을 탐하고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리라. 하지만 하느님만이 아시는 때가 되면 내가 심어놓은 씨앗들이 싹이 터서 그들 마음 안에 뿌리 내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보다 참된 길을 찾아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리라.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크게 슬퍼할 일도, 또 크게 기뻐할 일도 없는 셈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이고 그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경쓸 수 있는 보다 본질적인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보이다.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끊어 버려야 하고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할 수 있고 실천해 나갈 수 있다.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한다. 사제는 더 사제 다워야 하고, 수도자는 더 수도자 다워야 하며,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성화'를 찾아야 한다. 육체의 고난은 쉬이 지나가 버리고 보다 신경써야 할 것은 마음의 진정한 평화이다. 폭풍우 속에서도 곤히 잠들어 계시는 주님의 마음처럼 우리 역시도 일상사의 온갖 풍파 중에서도 잠들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지긋지긋한 벗인 육신의 요구들을 어느 정도 끊었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하느님의 시련이, 그리고는 악마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 걸음마를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할 공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 스스로 훌러내려가는 셈이니 말이다. 오늘 또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나는 걸어가야 한다. 언제나 내 목표를 뚜렷이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걸어야 한다. 비록 다리가 성하지 ...

잘 산다는 것

"잘 산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오늘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잘 산다는 건 뭘까요? 한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뭔가를 이루면 잘 사는 걸까요? 하지만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그의 위업인걸요. 잘 산다는 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요. 아예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런지. 뭔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지. 세우고 쌓아봐야 부질없는 짓이니 오히려 반대로 그런 쓸데없는 욕구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든 저든 모종의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면 되는 것인지… 만일에 교회 안에서 그 답을 찾자면 이런 말을 들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뭔가 뚜렷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지요.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누군가는 십자군 전쟁을 치른걸요. 이 질문의 답은  아마 평생을 두고 찾아야 하는 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고 어느새 살아갈 나날보다 살아버린 나날이 많아지게 되면 슬슬 내려놓는 것들이 많아지겠지요. 어쩌면 지금부터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구요. 이런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그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으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 하나가 내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육신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니, 우리의 모든 활동은 '허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테지요. 그래서 '허무'해 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할 듯 싶은데,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 그 실마리를 쥐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제자들이, ...

영적 무감각

방금 일어난 일... 부활 주일을 마감하면서 볼리비아에 사는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고기 파티를 하고 있었다. "쾅쾅쾅!!!"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십니까?" 밖으로 나가보니 차가 한 대 있고, 그 안에 한 소녀가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신부님, 축복 좀 해주세요. 얘가 마귀를 봤데요." "네? 무슨 말이죠?" "얘가 자기 방에서 놀래서는 마귀를 봤다고 하면서 미친듯이 놀래는 거예요." 감이 왔다. 애는 정말 마귀를 본 셈이고,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성수를 들고와서 영대를 걸치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잘 들으세요. 어둠의 영은 그냥 다가오지 않아요. 분명 가족들 가운데 어둠의 영을 불러들인 사람이 있을 거예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낙태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저는 여러분들을 모르지만 분명히 가족 구성원 안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신부님, 이 애가 자는 방도 좀 축복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허... 참..." 결국 따라 나섰다. 고기 파티 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트럭을 몰고 그 차를 따라서 그 집으로 갔다. 그리고 먼저 방을 축복했다. 그리고 돌아와 그 소녀에게 설명을 했다. "얘야, 잘 들어, 나는 가톨릭 사제이고 요셉 신부라고 해. 방금 전에 네 방을 축복했어.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네 방으로 가자꾸나." 그리고는 여전히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그리고 방 안에 아이를 앉혀두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잘 봐. 신부님이 네가 보는 앞에서 다시 방을 축복할께. 네가 꼭 봐야해." 그러면서 방을 축복했다. 아이는 두려움에 떨다가 방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말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다시 말씀 드릴께요. 분...

부활의 숨은 비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거룩한 성인 하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초대하고 싶으신 거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잃어버린 이들에게 더욱 집중되어 있으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성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들어높여진 이들인 셈이다. 그들의 원래 자리는 우리와 똑같은 자리이다. 그들은 그 들어높여짐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냥 평범한 종이는 이런 저런 용도로 쓰이다가 수명을 다하면 그만이지만 포스터로 선별되는 종이는 더 오랜 시간 햇볕에 노출되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나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다 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영성생활 중에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룩함에로의 추구를 한답시고 자신의 달콤한 경험을 찾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우리가 진정 거룩함으로 다가가려면 거룩하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가 거룩함을 나누어야 한다. 거룩한 이들 끼리의 고상한 말잔치는 다른 무언가를 양산하지 않는다. 정말 거룩해지고자 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가톨릭의 신앙은 '파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미사를 마치고 나면 그 충만한 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가 가진 신앙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은 죽은 이가 살았을 때에 누리는 기쁨이다. 이미 살아있는 이가 다시 산다는 것은 말도 안될 뿐더러 그런 기쁨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신자들이 부활 가운데 공허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부활을 죽음 가운데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부활 밤에 모여 밤새도록 떠들며 기쁨을 나누어 보았자 이튿날이면 다시 공허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진정 부활을 만끽하고 싶으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가야...

나를 팔아 넘길 자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 넘겨 버립니다. 세상의 재화와 지식이 한 사람의 구원과는 정 반대로 작용할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총아가 있어서 원하는 정보는 뭐든 거기서 캐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알면 나아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질수록 마음의 평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돈을 벌어서 외국 여행을 가서 최고급 호텔에 숙박한다고 한들 마음이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물질적인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오직 유일하게 진리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가치를 말합니다. 최고의 진리는 다름아닌 최고의 사랑입니다. 한 영혼은 오직 진정 사랑할 때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맛있는 음식을 먹든 맛없는 음식을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과 있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지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사랑 가운데에서 오직 최고의 사랑에 다가설 때에 진정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엄마고 아빠고 형제일지라도 유한하고 부족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쉴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 안에서 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더 높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면서 언제나 마음이 불안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하지 않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꾸준히 질문해 왔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나의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뭔가 해야 한다'고 집중적으로 교육받아 온 나의 과거의 찌꺼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하겠다는 의도 안에서 우리는 좋은 것들을 찾아 나서긴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연마하지 않고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처럼 먼저는 우리 내면의 흐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셈이다. 어제 페이스북을 놓았다.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신념 속에서 알게 모르게 내어 바치고 있었던 나의 시간과, 명예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은 셈이다. 나아가서 형제들과의 삶 속에서 나는 또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작정이다. 악마는 우리 안에 미묘한 목소리를 집어넣어서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자꾸 불화를 일으키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리 공동체의 삶 속에서도 나는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 결국 내려놓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해 보려던 그 의지를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는 셈이다. 그리고 그 비워진 공간 속에 무엇이 채워질 것인지는 분명하다. 공허로 남아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내 의지의 내려놓음. 이는 상당한 시련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초컬릿을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쓴 약을 먹이려는 엄마와 같은 심정이다. 나의 의지는 여전히 육에 물들어 있고 편안함과 쉬운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라나야 할 때이고 십자가를 져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