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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맞선 복순이네 2

복순이네는 그렇게 그 마을을 떠나 왔습니다. 그리고 이웃 동네로 갔지요. 복순이네는 이번 일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 수 있었지요. 복순이네는 바닥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루 먹을 거리도 구하기 힘든 때가 있었지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좌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련하시는 분에게 간청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다른 지방에서 온 한 가족이 집도 없이 떠돌면서 어떤 일이든지 맡겨지는 대로 성실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인정 많기로 소문난 김진사에게도 그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김진사는 그들을 불렀고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복순이네는 사정을 설명했고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할테니 굶어죽지 않게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진사는 그들에게 소우리를 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비록 소우리 한 켠에 자리를 마련했지만 더는 이슬과 서리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행복해 했고, 일을 하고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해 했습니다. 그들은 김진사의 말이라면 하늘의 명처럼 떠받들고 성실하게 일을 했고 결국 그들의 성실함은 김진사를 감명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김진사가 복순이네가 살던 옆동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진사는 그 고을의 수령인 박대감을 찾아뵈었고 대포를 한 잔 나누었습니다. 박대감은 동네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며 투덜대었고 김진사는 집에 일하는 한 가족이 있는데 그 성실성과 정직성은 어디 내어 놓아도 모자람이 없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박대감의 귀가 솔깃해졌고 자기 집에 아주 좋은 자리를 마련할테니 그들을 좀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김진사는 그들을 자식처럼 아꼈기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긴 것에 기뻐하며 그들에게 돌아가 채비를 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복순이네는 원래 살던 동네로 돌아왔습니...

궁금해 하는 이유

우리는 주변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다양한 데에 근거를 두고 있지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마땅히 호기심을 지녀야 합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이지요. 이 경우에는 호기심이 없어서 문제가 발생하지요. 부모가 자녀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이유는 ‘아끼고 보살피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데에도 호기심을 지닙니다. 우리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호기심을 지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돌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로서는 화제거리가 필요한 셈이지요. 그들이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술을 먹고 음주운전을 해서 감방에 가든 어디까지나 호기심일 뿐 그런 그들의 사연에 내가 뭔가 도움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는 친구들은 서로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행여 필요한 것이 생기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챙겨 주려고 하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우정을 기대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 설정한 범위가 있어서 쏟아붓는 사랑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 많은 친구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에게 전해진 나의 말들이 다른 곳에 가서 엄청나게 퍼져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서 다른 제3자의 이야기를 흥미 진진하게 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미 당신의 이야기도 또 다른 이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부자와 맞선 복순이네

어느 마을의 악덕 부자가 돈을 더 벌고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복순이네 집 뒤에다가 거름창고를 만들어 사람들이 가져오는 거름들을 모을 생각을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부자의 그 계획을 알고 나서는 껑충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가서 창고를 지을 일을 하러 오는 이들에게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창고를 짓는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맡긴 건 부자이고 자기들은 창고를 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열심히 싸워서 결국 그 일꾼들을 돌려보내고 일꾼들은 부자에게 난색을 표하고는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복순네는 자신들이 이룬 업적에 흐뭇해하면서 그날 밤은 발을 뻗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마음이 바뀐 게 아닙니다. 부자는 여전히 돈을 벌고 싶었고 더군다나 복순네가 괘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은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복순네가 일하는 논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논마지기를 값을 조금 더 쳐서라도 다 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부자는 그 논의 주인이 되어 복순네를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복순네에 대한 소문을 좋지 않게 내서 주변 사람들이 그 누구도 복순네를 신경쓰지 않도록 해 버렸습니다. 결국 복순네는 그 동네에서 살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났지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 5,39)

세상의 힘에 맞서는 올바른 방법

힘에 힘으로 맞서려면 더 큰 힘을 키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나보다 더 힘이 센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내세우는 힘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해서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하면 결국 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들의 힘은 막강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싸우는 방법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강력하신 분에게 기대는 방식을 써야 합니다. 그 방법이 없이 우리끼리 힘을 모아 맞서는 것은 결국 패배를 예상하고 달려드는 꼴과 같습니다. 세상의 누군가가 뭔가를 이루려 하는데 그걸 막아 보겠다고 나서지만 그런 시도가 안될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곳, 그 장소에 가로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힘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이루고 맙니다. 댐에서 터져 나오는 물줄기를 손가락을 틀어막아 막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본질은 ‘수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수압이 제거되지 않은 채로 구멍난 부분을 막는다고 막은 게 아니지요. 결국 손가락에는 힘이 빠지게 되고 그러는 동안 더욱 커진 수압은 다른 곳으로 물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할 테니까요. 간단한 예로 어린 자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을 때는 그들을 힘으로 제압해서 막을 수 있습니다. 용돈을 빼앗거나 집안에 감금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핵심은 그 아이 스스로 생각하게 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한 일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수압을 제거하는 일 없이 틀어막는 욕구는 반드시 다른 쪽으로 더욱 심한 반동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수압을 제거하는 작업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여도 보다 본질적인 작업입니다. 수압이 제거되는 날이 진정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상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이 ‘수압’이라는 것은 마지막까지 제거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는 동안 우리는 많은 이들을 빛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지혜

옛 현인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이미 다 고민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지혜서’에 모아져 있지요. 잠언과 코헬렛, 집회서와 같은 책들은 그 지혜의 정수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뭔가 대단한 것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저마다 주어지는 기회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갈 것일 뿐이지요.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이도 있고,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삶을 부여받는 셈입니다. 시작도 그러하고 마침도 그러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부요하게 되거나 가난하게 되거나 하는 것은 절대적인 삶의 지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저마다의 몫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부자라고 마땅히 행복한 법도 없고 가난한 이라고 무조건 불행한 법도 없지요.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무에 열심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셈입니다. 뜻밖의 죽음의 모습을 접하고 우리들은 놀라지만, 실제로 하느님에게 모든 것은 ‘의외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삶을 알고 계시고 그에 가장 적합한 마무리를 주시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제 명을 다 하고 죽고, 누군가는 일찍 간다지만 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언제 갈 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지요. 물론 제 명을 깎을 수는 있습니다. 미친듯이 담배를 피고, 술로 몸을 해치는 사람이 제 명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는 만큼 주어진 목숨을 소비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요. 타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어 보다 더 긴 수명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의 삶의 지표를 올바로 정하고 매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저마다 정한 것이 이미 존재할 것입니다. 모쪼록 그 최종지표가 하느님이고 순간 순간마다 방향 점검을 잘 해서 어긋나...

하느님의 계명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사 48,18-19) 하느님의 계명에 대해서 엉뚱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과거 십계명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준수해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명에는 그 본의가 내재되어 있지요. 십계명의 내적 계명의 근본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계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도,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도,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위한 계명이며, 나아가 나머지 모든 계명들은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계명들입니다. 그 밖의 계명은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마치 세상이 복잡해지니 여러가지 복잡 다단한 계명들이 필요한 듯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그에 관해서 관련 법률이 필요없지만 인터넷이 생기고 나서는 그에 관한 법률이 생겨나고 그것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근본이 바뀐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근본 핵심에 접근할 때에 우리는 모든 계명을 완수하는 셈이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은 이유이며, 안식일에도 일을 한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잘 법에 매달립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물어대기 일쑤이지요. 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모든 걸 하세요. 그럼 됩니다.” 우리가 근본에 충실할 때에 우리는 영원에 맞닿은 이들이 됩니다. 그러면 위의 성경 구절에서 약속된 것들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선물한 평화가 우리를 통해서 퍼져 나...

갈증과 물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이사 41,17) 성경에서 등장하는 ‘물’의 비유는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이의 갈증을 채워주는 수단입니다. 물론 단순한 ‘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언제 속시원함을 느낄까요? 간절히 찾던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러합니다. 알고 싶던 답을 알게 되고, 모르던 것을 깨닫게 되면 내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지요. 또한 누군가의 따스한 관심과 애정을 받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애정’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이 주시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고, 그분의 사랑으로 이끄는 생명의 물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늘 준비되어 있고 우리에게 나눠주려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것에 생각만큼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흥미롭고 재미난 것을 찾기 일쑤이고, 나의 정신을 어질하게 하는 것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그리고 생명의 물은 심지어 마주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마르면서도 목마른지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목마름을 엉뚱한 것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엉뚱한 것에 ‘중독’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지 않고 엉뚱한 액체를 들이키니 거기에 중독되어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물을 찾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갈증으로 혀가 탈 정도입니다. 그리고 물을 만나면 쉴새 없이 들이키곤 하지요. 그런 이들에게 물은 무한정 제공됩니다. 그리고 들이킨 물로 힘을 얻어 다른 이들을 열심히 샘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물을 들이킨 이들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물을 들이켜 갈증을 해소하는 기쁨으로 충만하며 나아가 이 기쁨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려 합니다. 나누지 않는 물은 이상한 물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