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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운명

어제 성경 강의를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모은 것과 그 가운데 배반자 유다가 끼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교회는 이렇듯 심지어 예수님이 모은 이들 가운데에서도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했지요. 교리가 끝나고 한 자매가 묻습니다. “그럼 유다는 어떻게 되었나요? 구원 받을 수 없나요?” “우리는 절대로 한 사람의 구원의 여부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지요. 하지만 드러나는 여러 정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능하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일찍부터 유다의 마음을 아시고 경고에 또 경고를 하셨습니다. 제발 그 일을 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모든 제자들이 깨끗해서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면서 전부가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하셨고 수난 만찬 당일 때에도 너희 가운데 한 명이 배신할 것이라며 미리 경고를 해 주셨지요. 그 사람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로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유다에게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베드로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사전에 경고하셨지요. 하지만 유다도 베드로도 결국 자신이 경고 받은 일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드로는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이전보다 더한 열심으로 선교에 매진하였으며 나아가 전승에 따르면 박해가 극심했던 로마로 돌아와서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생을 마감하지요. 헌데 유다는 사도행전에서 내장이 쏟아져 죽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은 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의 중요성은 바로 우리들 앞에 똑같은 기회와 경고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려는 나쁜 생각과 계획들을 그만두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

아이들

저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모래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모래는 만능이었지요. 내가 만드는 대로 구멍이 생기고 언덕이 생기고 하니까요. 그렇게 만든 땅에 친구들과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곤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더욱 멋진 장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댐을 만들고 물을 가두고 흘려 보내고 배를 띄우고 하는 놀이를 했지요. 저는 백화점 같은 곳을 가면 늘 장난감 코너를 둘러봅니다. 장난감은 아직도 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아직 어린이 마음인게지요. 헌데 거기에서 ‘가짜 모래’를 만났습니다. 뭔가 특별한 액체가 섞였는지 모래 비슷하면서 모래가 아닌 무엇이었습니다. 사가지고 가서 집에서 가지고 놀라는 말이었겠지요. 하지만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습니다. 만지는 느낌도 이상하고 모래를 장난감으로 산다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놀이터에 가면 있는 게 모래였는데 그걸 집으로 가지고 가서 그걸로 혼자 뭘 할 수 있을지... 아마 나중에는 ‘가짜 물’도 팔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벌써 팔고 있을까요? 함께 어울려서 놀지 못하는 아이들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매 가정마다 하나씩의 자녀를 두고 애지중지하며 곱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룰 때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요? 어쩌면 벌써부터 그 징조가 드러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에게 집중한 아이들이 서로 저마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아이들의 정신은 여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방구를 찾고 놀이터를 찾습니다. 지금은 ‘온라인’에서 그 욕구를 해소하고 있지요. 그들은 인터넷을 자신들의 주무대로 삼고 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몰아내어 그들은 자신들만의 놀이터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놀이터는 안타깝게도 특정 어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요. 그리고 부모들의 통제권을 벗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더 멋진 삶을 선사하겠다는 의도로 아이들에게 ...

내면에 흐르는 움직임

로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이루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정복해가면서 거의 그것을 이루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자신의 부귀와 영화 속에서 죽음이 씨앗이 자라고 있었으니 바로 퇴폐와 향락의 문화였습니다. 수많은 공허한 말잔치와 음란하고 천박한 문화 속에서 그들의 정신은 무너져가고 있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에 그러한 것을 '유행'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의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전에 없던 기술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 그 자체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메신저가 바람 피는 용도로 사용되고, 웹사이트가 서로 증오하게 만들고 엉뚱한 생각을 전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내부로부터 죽음의 씨앗을 키우게 되고 결국은 인간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유행’이라는 이름 하에 그것이 자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더욱 자극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텔레비전은 연일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합니다. 연일 음식을 소개하면서 말초신경을 더욱 자극할 방법을 만들고 있지요. 머지 않아 기술이 발전되어 텔레비전에서 냄새까지 나오기 시작하고 촉감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인간은 더욱 더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보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움직임들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 아이돌들의 옷은 더욱 짧아지고 춤은 더욱 선정적이 되어가는지, 왜 갈수록 프로그램들은 우리의 욕구를 더욱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과연 이율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기업들이 정말 그렇게 인간을 생각하는 기업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수액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행을 무조건 따라가는 이가 되지 마십시오. 과연 무엇이 유행이 될 것입니까?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가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은 과연 균형잡힌 것일까요? 천만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

초월하는 믿음

믿음의 내용은 인간의 논쟁으로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근본이 하느님의 계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원래 체험에서 비롯한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헌데 이를 이해하기 힘들어 했던 이들이 원래의 계시에서 어긋나는 내용을 자꾸 이성적으로 도출해내기 시작해서 교회 역시도 이성적으로 맞대응을 해야 했지요. 그 결과로 우리는 ‘신학’이라는 거대한 도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번번이 그 신비를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학문 따위로 우리가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의 것이 아니지요. 현대는 과학의 시대인지라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이 증명되어야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닫혀버린 것이지요. 신앙 그 자체는 과학적이 아닙니다. 과학은 ‘심장’을 해부하고 연구할 수는 있어도 ‘사랑’을 찾아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맥박이 빠르게 뛰고 혈액 안의 특정 호르몬 양이 증가하는 것을 관측할 수는 있어도 그 안의 자유의지를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의지의 선택의 문제이고, 하느님이라는 초월적인 분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낱낱이 밝혀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증거를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는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 하나 올바로 세우지 못하고 이웃을 따스하게 대하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증거를 대라고 하고, 영성생활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라고 하니 그들은 장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과 신앙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은 신앙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안내해주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때가 되면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과학이 하는 일은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신앙이 절로 생겨나는 일도 없습니다. ...

과거와 화해하기

우리는 과거와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감정을 고스란히 재현해 내지요. 우리가 누군가와 다투었을 때 느꼈던 분노와 억울한 심정은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화해가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화해를 하려면 화해할 능력을 갖춘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로서는 이 자리에 예수님 말고 더 적절한 능력을 지니신 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악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과거와 화해하지 못합니다.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 천천히 곱씹으면서 다시금 나 자신을 살펴봅니다. 그 일이 타인의 죄과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우리의 구세주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니 나 역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나의 오류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 오류를 찬찬히 되살피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결심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를 정돈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런 작업 없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고해를 봅니다. 모든 암울함과 어두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여전히 마음에 증오가 식지 않은 채로 허겁지겁 고해소에 들어와서 ‘주일 어긴 것’만 고해를 합니다. 그러니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는 과거 속에 얽매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덮어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상처는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치유를 진정으로 이룰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이 오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원의 희망, 불멸의 희망을 바탕으로 현세의 모든 억울함을 당신에게 봉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억...

평화를 모르는 이들

악한 이들은 마음 속에 평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모든 것과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헌데 세상이라는 곳은 그 다양성으로 서로 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과 다퉈야 하는 것이지요. 새 차를 한 대 샀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 차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이상이 생길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헌데 악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기쁨은 차를 처음 산 순간으로 한정됩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성가심일 뿐이지요. 악인들이 사람을 만나면 더욱 최악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상대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약한 이들을 좋아합니다. 그 유약성으로 언제나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그의 유약성을 가중시키기 위해서 언제나 위협하고 협박하는 방식을 쓰지요. 그래서 악인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돈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 재물이라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훌륭한 지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악한 의도로 계획을 세우고 상대를 공략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단 한 순간도 평화 속에 머무르는 적이 없습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성체 앞에 고요히 머무르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일을 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그렇게 남들을 짓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불쌍한’ 이들입니다. 영원의 가치를 모르고 행복을 모르는 불쌍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밤에 걱정이 많아서 잠도 잘 못잡니다. 그리고 전에 다툰 누구와의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나서 그들을 괴롭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는 그들에게는 최악입니다...

평판

사람들의 평판과 하느님의 평판 사이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씁니다. 언제나 그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할지 궁금해하면서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요.. 반면 하느님의 평판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주로 외적인 것에 좌우됩니다. 눈으로 보여지고 들을 수 있는 것에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쓰는 이들은 외적인 활동에 치중합니다. 뭔가 좀 더 사람들이 감탄할 수 있는 활동을 남기려고 애를 쓰지요. 하느님의 평판은 내적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있는 원의의 진실성, 성실성, 책임감, 인내, 관용, 온유, 친절과 같은 것들을 보시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칭송을 받는 사람이 내적으로 올바로 서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알아내기 힘든 일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등떠밀려서 하는 것인지 당장의 일만을 바라보면 알아내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몇가지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겸손 - 하느님의 평판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하고 미흡한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함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로서는 상대의 내면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고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인내 -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참아 견디는 것에 굉장히 특화되어 있습니다.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인내로이 행동합니다. 특히 고통을 두고 그는 아무나 보일 수 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즉,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것이지요. 성실 -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는 한결같고 꾸준합니다. 누군가의 눈치를 봐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렇게 합니다. 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