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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

독(毒)은 멀쩡하던 육체에 스며들면 그 육체를 파멸시켜 버립니다. 영혼에게도 독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악한 의도(증오, 원한, 시기 등등)이지요. 누군가 독한 마음을 품고 악한 의도를 품으면 그 독이 상대에게 뻗어나가 그의 내면에 파고들어 결국 그 상대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독에는 그에 상응하는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악한 의도는 어떻게 상쇄되는 것일까요? 상대의 악한 의도를 잠재울 수 있는 것, 그 가장 기본 바탕은 우리의 인내입니다. 그리고 ‘겸손’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은 독이 파고들어도 당장 영혼에 스며드는 것을 일단 가로막을 수 있게 됩니다. 인내와 겸손이 없으면 없을수록 어둠의 영이 던지는 독은 우리의 내면에 금세 파고들고 말지요. 그러나 이러한 덕목들은 ‘해독’, 또는 ‘치유’의 기능은 없습니다. 영혼의 독을 해독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랑스러운 이만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치료제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을 선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기들을 좋아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료제로서의 사랑은 보다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내어주는 사랑이고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감싸안고 나서는 사랑이지요. 바로 이러한 사랑이 영혼의 독을 중화해 나가게 됩니다. 독은 반드시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가능한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독제와 치료제가 있다면 이미 독이라는 것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사랑에 더욱 헌신하는 만큼 우리의 내면은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 그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을 때에 성경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라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다만 그들의 눈에서 가리워졌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 안에 자리잡은 것이지요. 예수님이 내면에 자리잡게 되면 그들의 삶은 변화하게 됩니다. 즉 내면의 중심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는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지상의 삶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살 궁리를 하였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안에 자리잡고 부터 그들은 반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천상의 삶을 추구하게 되지요. 우리는 매번의 미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닫혀 있기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먹는 것은 그냥 빵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을 알아보는 이들은 미사를 통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힘을 얻고 가슴이 타오르는 체험을 하지요. 그들이 먹는 빵은 천상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되지요.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본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늘 가는 미사에 가서 늘 하던데로 빵조각 하나를 얻어먹고 온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교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여전히 증오에 사로잡혀 있고, 탐욕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눈을 열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진정으로 받아모실 수 있게 됩니다.

배와 바람과 주님

배는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호수에 부는 바람과 물결은 우리 삶에 늘 존재하는 일상적인 크고 작은 시련을 의미하지요. 그 바람과 물결은 우리의 진로를 늘 방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 닿으려는 곳으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요. 그리고 그 배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싶어하시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분의 다가옴이 너무나 범상치 않게 보여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돈을 벌고 성공을 하는 등의 일들이지요. 헌데 예수님의 다가옴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어오시니까요. 우리의 삶이라는 배에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다가옴을 두려워하지요.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선과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시지요. 그분은 비록 이상한 방법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그분이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미 익숙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이를 좋아하고,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며, 우리는 사랑하기를 즐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로의 부르심이 주어질 때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오던 삶과 많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고 익히 알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선한 삶이고, 진리의 삶이며, 사랑의 삶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제서야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 주님을 모시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순간 배는 이미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시기 전에는 열심히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너무나 힘들었던 그 곳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려고 하는 순간 이미 가 닿는...

매력적인 불교?

집을 짓는 방법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비슷할 것입니다. 먼저는 기초를 놓고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마침내 대들보를 얹는 것이지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대들보부터 공중에 붙들어매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것도 비슷하지요.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비슷한 양태를 지니는 것이지요. 결국 바람직한 인간, 정돈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바, 수덕을 위해서 필요한 바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생히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 안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비적 영역’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하느님을 매우 닮아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수많은 업적들을 이루어 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로움은 세상 그 어느 인간의 지혜 가운데 으뜸이라도 이길 수 없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근본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위한 선인들의 희생…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감싸안는 사랑. 이는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로 불교가 매력적이라고 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조금 안타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아직 맛보지 못했으니까요.

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육신으로 태어남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탄생, 즉 몸이 형성되어 어머니의 모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지상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지요. 육신으로 태어난 이는 자연스럽게 육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고 먹거리를 찾아 울음을 터뜨리지요. 그리고 육신을 위험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피하고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반면 그 육신 안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은 이 영혼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안에 뭔가 색다른 것이 있기는 한 것 같이 느껴지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영혼도 비슷합니다. 영혼의 탄생이 필요하고 영혼이 형성되면 그 모체에서 독립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하고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혼으로 태어난 이는 자연스럽게 ‘영혼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 지상의 공기를 숨쉬고 지상의 먹을 거리를 찾는 것이라면 영혼에게는 영혼의 공기와 영혼의 먹거리가 필요하지요. 또한 영혼에 위험이 되는 것에서 스스로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빚어져 독립적인 자유를 지니고 나오긴 했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올바로 알지 못해서 자신의 소중한 영혼을 지상의 것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지 않아야 할 공기를 마시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며 나아가 피해야 할 것을 오히려 받아들이는 중이지요. 그래서 영혼이 병들어가고 심지어는 죽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증은 육신으로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시해 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영혼을 되살려야 합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영혼은 육신의 운명을 뒤따라가게 됩니다. 즉, 결국 죽어 버릴 운명이지요. 우리는 육신에 치장을 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가꾸고 다듬지만 결국 육신...

맥빠진 부활

가난의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 소유의 기쁨은 없다. 고독을 즐기지 않은 이에게 진정한 만남의 기쁨은 없다. 침묵해보지 않은 이에게 주님의 명을 따르는 기쁨은 없다. 낮아짐을 체험해보지 않은 이에게 높여짐의 기쁨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올바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이다. 부활은 그저 종교행사로 끝나버리고 우리는 넘쳐 흐르는 계란과 부활 밤의 각종 행사 준비로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부활을 보낸다. 아무리 알렐루야를 외쳐 보지만 마음은 더욱 공허해질 뿐이다. 올바른 사순이 없었기에 부활은 더욱 비참할 뿐이다. 부활의 체험이 없는 신앙은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아서 이러한 공허한 나날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신앙을 잃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애시당초에 잃을 것조차 없었다. 신앙을 잃은 게 아니라 지금까지 지녀오던 호기심과 흥미를 잃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더라면 우리는 산을 옮겼을테니까.

날카로운 화살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2)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을 이렇게 훌륭한 무기로 만드신 것은 영원히 감춰두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그것을 꺼내어 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을 숨어 계셨습니다. 철저히 드러나지 않고 당신의 신성을 숨기고 계셨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러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지요. 우리 신앙인들은 마냥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그저 힘겨워하고 괴로워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갈고 닦은 것으로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에 빠진 이들을 멸하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둠에서 사람들을 살려 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도구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에 빠진 이들은 신경질적이고 못되고 이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서도 사랑을 가르치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고 그 도구는 ‘진정한 사랑’ 즉 ‘십자가의 사랑’을 훈련한 도구일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화살통에서 화살들을 꺼내어 필요한 이들에게 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들의 마음 안에 잘 파고들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사랑을 날카롭게 잘 갈고 닦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