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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의 합당한 자세

세상 사람들은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간단합니다. 높은 사람의 위치에서 대합니다. 그리고 낮은 사람은 낮은 사람의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높은 사람이지만 교양이 있긴 해서 낮은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수는 있지만 결코 낮은 사람이 기어오르는 것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들 제 선을 지키면서 머무를 뿐이지요.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마치 우리의 능력인 양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주인이 허락하신 땅에서 주인이 허락하신 능력으로 일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몫을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신자들은 하느님에게 ‘요구’를 합니다. 이러저러한 일에 대해서 합당한 설명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달라고 강렬하게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스스로 하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하느님보다 더 높으니 말이지요. 비록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자신을 두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생각이 하느님이 하는 생각보다 옳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그들을 그냥 두십니다. 그들이 제 마음대로 생각하게끔 내버려 두십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신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위해서 합당한 요소들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동에 따라서 그 결과물을 얻게 될 것이고 그 현실 앞에서 변명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도 않으며 과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충실한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우리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 분이십...

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사제의 여성과의 만남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피치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하다면 여성분들은 가장 적합한 ‘여성 지도자’를 찾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덕망 있는 수녀님이나 본당의 신뢰할 만한 여성 평신도를 추천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피치 못하는 경우라면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가능한 모든 추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면담은 거의 한 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는 ‘바쁨’이 일상화 된 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한 두 번이 끝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과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고해소 이외의 환경에서 장기적인 면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케이스는 한 번의 개인 면담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고 장기적으로 한 사제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늘 이용할 수 있는 고해의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또는 본당처럼 서로 같은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 찾아온 내담자가 ‘장기면담’을 요청할 때에는 그가 사는 곳 주변에서 합당한 인물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사제는 스스로 ‘분별’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한 분별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고해소 외에 따로 다른 면담을 시도하는 것에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해소 밖을 ...

신앙을 선택하기

자신의 내면의 기준에 따라서 추종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내면에 아름다움과 화사함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외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화사한 것을 추종하게 되겠지요. 물질적인 탐욕이 큰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선호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을 향해 방향지워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그리 아름답지 않아도 또 돈을 벌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우리의 노력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면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신앙과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은 더 높고 더 많고 더 부유하고 더 화려한 것을 원하는데 신앙이 가리키는 방향 가운데에는 그러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적 선호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지요.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자유의지가 세상을 선택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세상 안에서도 그렇고 영원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의 기쁨 대신에 한시적인 기쁨을 선택한 이들이 그 한시적인 기쁨이 사라지게 되면서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너무나도 저속한 욕구 속에서도 영원한 나라를 갈망하기 때문에 ‘이상한 수단’을 개발해 내게 되었습니다. 즉, 특정한 외적 행위를 하면 영원한 나라를 얻는다는 우격다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특정한 외적 기도 행위를 얼마 채우면 천국을 얻는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생활, 의로움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이 외적이고 형식적인 행위의 신앙생활이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신...

하늘나라와 희망

하늘나라는 시작되었으나 완료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하늘나라에 아직 참여하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일단 시작만 되면 성장하게 될 하늘나라이지만 그 시작을 이루지 못한 채로 스스로는 나름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늘나라에 참여했다는 것을 외적인 종교 예식으로 국한할 수 없다. 하늘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좀 더 내밀한 영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사랑을 배운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겠노라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다가설 때에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씨앗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로서 씨앗에 대한 정보를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씨앗을 가진 게 아니다. 씨앗은 두 손으로 받아야 하고 밭에 심어져야 하며 그에 합당한 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성당에 다닌다면서 선하지 않은 이들, 여전히 세속적인 욕구가 내면에 가득하면서도 자신은 본당에서 중요 직분을 맡고 있으니 훌륭한 신자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훗날 하느님 나라의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흐리멍덩한 분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정의를 만드신 분이 ‘정의’를 무시하실 리가 없다. 다만 그 정의가 우리의 짧은 생애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희망’을 지닌 이들은 이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이다. 즉, 억눌려 있던 이의 권위를 세우시고 교만한 자들을 내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단 하나의 것은 바로 겸손한 마음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 낮춰진 마음 뿐이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안식일의 치유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카 13,14) 우리가 걱정하는 대상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적지 않은 경우에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과 속박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안위’입니다. 본당에서 발언이 대체로 강하고 말이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진정으로 참된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을 찾아보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 대상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의 생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뭔가 바꾸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입장이 뒤바뀌어 반대로 내가 주장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이권을 도로 까먹는 일이라면 입을 다물어버릴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는 통에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은 목소리 한 번 내지도 못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성당에 이런 저런 제약 없이 나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성사에 참여하는 것인데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경우를 종종 관찰할 수 있습니다. 행사 날짜를 중순으로 잡아야 하는지, 후반으로 잡아야 하는지를 두고 한참을 다투다 보면 정작 가난한 이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들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 버리고 말지요. 예수님은 아무 주저없이 열여덟 해를 고생한 여인의 허리를 고쳐 주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당장에게는 크나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고수하고 외쳐온 안식일 준수의 율법에 상당히 어긋나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라는 핵심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

연예 산업

연예계는 엄연한 ‘산업’입니다. 여러가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을 생산해 내는 생산자와 그것들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이루어져 있지요. 생산자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민감하고, 또는 그 기호를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렇게 생산된 것들을 열심히 소비하고 또 스스로 마케팅의 일원이 되어서 주변에 그런 소식을 열심히 전하곤 합니다. 생산 대상에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예외가 없습니다. 유명 배우의 혼인 생활, 아역배우의 근황, 어느 배우의 성형 전후 등등 무엇이든 그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바로 그러한 소비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만 할래.’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대중의 관심을 사고 나면 자신에게 마지막 관심을 두는 대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또는 나중에라도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될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역학관계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일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인간의 기본권과 사생활 존중을 원하더라도 대중의 시선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내용이면 어디든지 파고들 테니까요. 사실 거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일종의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연예인이 아닌 우리는 ‘소비자’로서 그 산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기사글 가운데에서 연예인의 스캔들 기사를 클릭하는 순간, 바로 그 산업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관심이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정말 내가 그의 노래를 좋아하거나 연기를 좋아하던 누군가의 근황이 궁금한 것과, 잘나가던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기사에 은근히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분별을 가지고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한 관심과 대중의 사랑인지,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우리의 내면의 어지러움과 ...

신자들 간의 대출과 상환의 문제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탈출 22,24) 우리는 막연히 구약이 잔인하고 미성숙한 가르침을 담은 성경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 안에서 나오는 피가 튀는 살인의 장면이나 전쟁, 또는 이해하기 힘든 불륜과 복수의 장면들은 누가 읽더라도 그런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하지만 구약은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책마다 그 진행과정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전체의 흐름과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내면의 뜻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안에는 그 뚜렷한 가르침 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의 부분입니다. 특히나 ‘돈’에 민감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은행에서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자체로 정당한 이윤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들 안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른 면모로 간주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의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신자들 사이에서도 돈을 꾸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누구에게 어떻게 꾸어주는 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10억원짜리 집에서 사는 이들 가운데 8억원짜리 집에 산다고 가난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 돈 없다, 가난하다’라는 표현을 바로 이런 상대적인 빈곤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사실 ‘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에 비교하면 본인은 가난한 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라는 것은 정말 생활이 걱정되는 이, 즉 의식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