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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복음과 선포

교회는 여전히 복음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복음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딘가에 있으나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나오지 못하고 있다. 복음은 성경 안에 메세지로 존재한다. 또한 복음은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존재한다. 또 복음은 교회의 전례 안에, 거룩한 성사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복음은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복음의 체험은 학술적인 풀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구만 하는 신학자들은 복음의 체험을 이루지 못한다. 잘 이해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실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것을 살아내는 이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외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종교적인 열성’을 사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복음을 통해서 진정으로 기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든 저든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활동들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그 활동들이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려는 이에게 처음부터 던져지는 여러가지 도전들은 그를 기쁘게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다가서게 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도 어렵사리 통과한 어려운 시험을 그에게도 부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교회가 진정한 복음의 메세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메세지를 전하는 수단들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썰매를 타러 왔으면 재미있게 썰매를 타는 게 중요한데 썰매에 장식을 무엇을 했느냐를 가지고 한참을 따지기 시작하면 결코 재미난 썰매를 타지 못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심단체를 들어보자. 신심단체의 외적 형태를 유지하는 것과 신심단체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처음에는 괴리감이 없었다. 신심단체의 외적 형태는 근...

성정체성

성정체성의 가장 기본적인 식별 기준은 당연히 자신의 외적 성징(가슴의 남녀 차이, 성기의 남녀 차이 등등)이 1차 분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외과 수술로 그것을 바꾸어 버릴 가능성이 존재해서 그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기준이 모호하게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나아가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내면 안에서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느낌으로 인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형성될 가능성입니다. 여성스러움을 더 타고난 (외적인) 남자가 있을 수 있고, 남성스러움을 더 타고난 (외적인) 여자가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소아마비에 걸려 있는 이들을 위해서 도로와 계단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수단들에 편의를 도모해 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정상인의 범주에서 맞추어제작된 물건들을 다 뒤바꾸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즉,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품어안음을 해 주어야 하지만 장애를 ‘정상’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지요. 다른 하나는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내적 정체성입니다.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형성된 성 정체성인데 이것이 어떤 특정한 강한 체험이나 주변 환경의 요소들에 의해서 서서히 엇나가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는 ‘분재’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원래는 거대하게 자라야 하는 나무인데 쇠사슬을 칭칭 감아서 성장을 억제한 결과 거대한 느티나무를 아주 작은 화분 안에 살도록 해 버린 것이지요. 동성애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그들이 소수자라고 하여 억압 당하지 않도록 인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나아가 그들이 주장하는 ‘동성혼인’과 같은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바로 앞서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장애를 공공연하게 ‘정상’이라고 부르자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사회 제도적 범주 안에...

고귀함과 비천함의 참된 의미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고귀함과 비천함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깨끗하고 깔끔한 환경에 사는 것, 즉 부유하고 최신 기술을 향유하는 것을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 외적 재물의 양보다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고귀함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많이 깨어 있는가를 바탕으로 고귀함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다 다른 이유로 그 고귀함과 비천함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고귀함과 비천함에 대한 올바른 분별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입니다. 사람이 고귀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만이 진정으로 고귀한 분이고 그분을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을 때에 사람은 고귀해지는 것이지요. 반대로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비천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비천한 형제는 자신이 고귀해졌음을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지닌 신앙이 우리의 외적 가난을 참된 고귀함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가난하다고, 돈이 없다고 고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얻게 된 가난을 얼마나 내적으로 진실된 수단으로 수용하는지가 우리의 고귀함을 가늠하게 하는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난은 도리어 우리의 증오와 탐욕을 부추기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참된 신앙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수용하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는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부자는 신앙이 없을 때에는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돈을 더 벌어 들이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이 많을 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의 힘을 ...

성경을 배우는 방법

그렇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려면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요. 누가 가르칠 것이며 누가 배울 것입니까? 기술은 기술자에게 배우는 게 맞습니다. 너도 나도 처음 보는 기기를 앞에 두고 서로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술은 그 기술을 습득한 이에게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 걸까요? 그건 성경이 어떤 성격의 책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기술적인 요소를 찾는 사람은 기술적으로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경의 원어(희랍어, 히브리어)를 습득하고 있는지, 혹은 성경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추고 있는지 등등을 통해서 성경도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성경을 그렇게 읽는 것, 그렇게 습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것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더러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살기 위해서 받아들이고 읽어야 하는 책인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도와주는 수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 알게 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요. 주일 미사에 나가긴 하는데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해서 그 미사가 마냥 지겹기만 한 이들, 교회 봉사 단체에 가입을 해서 봉사를 하긴 하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이 피어나질 않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인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진실한 체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운다고 더 많이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우...

봉헌

바친다는 것은 나의 주도권 안에 있던 것을 바치는 상대의 주도권 안으로 넘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친 물건에 대해서 우리는 더는 권리를 지니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사제들은 하느님에게 바쳐집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바쳐지고 나면 세상은 사제들에게 대해서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제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바쳐지게 되면 이 사제는 세상에서도 떨어져 나오고 하느님에게서도 떨어져 나온 채로 어정쩡한 위치에 처하게 되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철저히 하느님에게 바쳐져야 하고 그 뜻을 충실히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세례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바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이미 세상에서 죽은 이들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에게 바쳐진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봉헌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자신의 생을 자신의 몫으로 지니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탐내고 세상 안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길을 걷다가 방황하게 됩니다. 이 봉헌의 의미를 올바로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합당한 봉헌을 이행할 때에 우리는 쓸모있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옹기장이 손에 들린 진흙처럼 옹기장이의 뜻에 우리를 기꺼이 내어 맡겨야 합니다.

가정

가정이 화두가 되는 것은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어른 세대는 어른 세대 대로, 젊은이들은 젊은이들 대로 어려운 점이 있으며 또한 서로간의 소통도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그 문제의 근본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에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회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저마다의 목적지를 지니게 되고 그 목적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회적으로도 문제를 양산하게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도우면서 그 목적지에 함께 가 닿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100만원을 벌기 위해서 다른 이가 지닌 50만원을 가져와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우에는 다른 이를 희생해서라도 나의 100만원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단순한 모양새가 오늘날 가족 구성원들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가족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내 가족의 공동선을 위해서 개개인이 지닌 욕구를 절제하고 희생할 줄 알았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저마다 소중해지는 욕구 가운데에서 서로의 욕구가 곧잘 충돌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도를 넘어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지요. 그러한 가운데 ‘신앙’이라는 보석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이라는 참된 권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마련된 아름다운 길이지요. 하지만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제대로 사용하는 이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복음화’가 필요합니다. 더 잘 믿기 위해서,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더...

하느님의 궤를 모시는 백성의 즐거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순간은 다양합니다. 누군가 취직을 할 때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고백을 해 올 때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여기 우리는 1독서에서 어느 백성의 기쁨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고 함성을 지르고 나팔을 불면서 기쁨을 한껏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궤’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궤는 언제나 이스라엘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곁에 두고 기뻐하는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기쁨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은 기쁨이지요.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을 그리워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 들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당에 나오는 이들에게는 이 목마름이 존재할까요? 어쩌면 적지 않은 이들은 너무나도 일상화 되어 버린 만남에 오히려 식상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계약궤 하나에 온 기쁨을 표현하던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구원이신 분 그 자체가 음식이 되어 목구멍에 넘어가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요. 우리의 마음이 기뻐하는 것에 우리의 보물이 있는 법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재물을 즐거워하는 이들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니 불쌍하기 그지 없는 이들입니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일시적인 것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꾸로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영원한 것을 제멋대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