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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피해야 할 '현세적인 것들' 목록

불륜은 올바른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와 놀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물론 부부 사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실질적인 불륜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충실한 배우자이신 하느님을 두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 불륜이 저질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죄는 불륜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다른 것과 놀아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은 육체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더러워져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더러움은 영혼에서 일어납니다. 영혼은 '죄'로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이 더러움을 느낍니다.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죄스러움에 빠져들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이미 느끼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오랫동안 더러운 환경에서 살면 그곳에 익숙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오랫동안 더러워져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느끼기를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대신해 줄 헛된 향수를 찾습니다. 그 향수는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더욱 더러움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이미 영혼에서 냄새가 나는 데 정작 자신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쁜 욕망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욕망' 자체가 죄가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가 있는 욕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욕망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도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갖 세속 욕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영혼은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욕망은 영혼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핸들입니다. 엔진이 좋은 차가 상가로 돌진하면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듯이 강한 욕망에 그릇된 방향이 설정되면 자기 자신을 비롯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됩니다. 탐욕은 필요 이상의 것을 과하게 욕...

초주검이 된 영혼

율법 교사의 의도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더 능력있는 이가 덜 능력있는 이의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상대가 그만한 실력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헌데 지금 한낱 교만에 사로잡힌 이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시험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 율법 교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율법 교사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즉, 내가 가진 합리적 사고에 하느님이 들어오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일쑤입니다. 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런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실천'하시는지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 결과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 다루듯 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다고 우겨대고 싶어합니다. 비슷한 인물로 '욥'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억울함에 대해서 하느님이 동조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욥 앞에서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 안에서 오직 정의로운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 앞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당하고자 한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고 실천할 때에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도 당한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골목골목을 찾아 다니면서 이 강도 당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도 당한 사람을 이웃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만한 확률로 일어날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처신하라...

하느님의 지혜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제 다루었으니 오늘은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내적 일치의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똑똑하다, 혹은 영리하다는 것과 전혀 다른 내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서울대를 나온 사람은 '똑똑하다, 영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억력이 좋고 시험문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렇게 좋은 머리로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중요 직분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지혜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영리함이 더할수록 지혜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 똑똑하다는 친구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처리까지도 똑똑하고 영리하게, 즉 세상이 추구하는 바대로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는 잘 돌보는 척을 하다가 어느 정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에는 가차없이 냉혹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용적으로 효율적이고 똑똑하고 영리한 일처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쓸 줄 알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어리석은 이들, 지혜롭지 못한 이들이 됩니다. 그래서 지혜롭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치,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는 항상 꾸준하고 성실하며 가식과 위선을 배제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면에 똥을 감춘 상자는 그 똥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일시적인 향수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춘 똥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냄새를 풍기고 다니게 됩니다. 반면 내면에 향기를 지닌 이는 그 향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향에 이끌리는 이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지혜를 흉내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

고요함을 찾아서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세속을 떠나 고요함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이번 한 주간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에게는 피정이라는 것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들어간 바로 그 날에 연락을 받았고 한 신자분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 짐을 꾸려 본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흙과 뒤섞어 놓은 물이 고요함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혼이 고요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무심코 지나치고 간과하고 있었던 마음 속의 어두움이 보이기도 하고 또 잊고 있었던 방향이 보다 뚜렷해지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고요함을 스스로 없애 버리는 데에 선수들입니다. 현대인은 꽉꽉 채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현란한 악보의 오케스트라도 쉼표가 있어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라는 악보를 온갖 음표로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떼를 돌보고 이리떼를 막아야 합니다.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사명이 더욱 뚜렷이 보이게 됩니다. 아무거나 집어먹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에게 관심이 있고 그분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내어서 그를 도와 주어야 하고 반대로 하느님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다른 욕망과 욕구로 다가선 이들을 가로막아야 합니다. 초전성당이라는 곳은 언뜻 외견적으로는 굉장히 고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게 되면 여러가지 면에서 엄청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심을 잘 잡고 있는 사제가 필요합니다. 어...

더 나은 상태

더 나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요? 아무리 해 본들 모든 것이 똑같은 것일 뿐이라면 왜 애를 쓰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루하루 애를 쓰면서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물건보다는 깨끗한 물건이 더 낫다는 것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게도 비슷한 것이 적용됩니다. 파괴된 영혼이 있는가 하면 더 나은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올바로 구분해야 하고 더 나은 영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낮은 단계부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1) 파괴적인 영혼 파괴적인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멀쩡한 주변의 요소들을 파괴합니다. 바로 악을 저지르는 영혼이고 죄에 빠져 있는 영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즐기는 영혼입니다. 거짓말을 즐기고 허영심에 빠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떠는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결과는 그의 주변에서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합니다. 이 영혼에게 오직 하나 필요한 덕은 바로 '회개'입니다. 2) 세속적인 영혼 세속 정신에 물든 영혼입니다. 악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언제나 악 가까이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그의 영혼은 언제나 죄지을 기회를 살피지만 죄가 가져오는 수치의 위험을 인지는 하고 있기에 드러나게 큰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양이 울타리 주위를 서성이면서 달디단 독초의 향기에 마음을 사로잡히듯이 그 영혼은 세상 언저리를 헤메이면서 어떻게 하면 드러나지 않게 죄를 지을 수 있을지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런 내면의 욕구는 언제나 유혹의 근거로 작용하고 결국 죄로 쉽게 빠져드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 좋은 가치에 눈 뜬 영혼 이 영혼은 세상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가치에 눈을 뜬 영혼입니다. 그래서 좋은 평판을 찾...

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우리는 우리가 하는 걸 다른 이들이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으스대고 싶은 것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세상이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세상이야말로 그 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올바로 알아야 세상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세상은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예수님이 알려 주시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 2.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 첫번째 항목부터 심도깊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는 과연 모든 것에 앞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보다 아버지를, 우리의 가족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단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랑의 대상의 될 수는 없습니다. 길을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면 ‘올바름’ 안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가족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마저도 감싸 안는 걸 그들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관계가 튼튼한 시골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서로의 뒤를 봐준다’는 언뜻 들으면 상부상조 같은 말마디 속에 때로는 올바르지 않은 일까지도 서로 뒤를 봐주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하느님에게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소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챙기고 나머지를 운용하고 있을까요? 이 역시 ‘그렇다’ 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챙길 ...

가치

올바른 가치를 배우는 것과 잡다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이라는 미명 하에 정말 많은 지식 정보들을 습득해 왔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 배움의 범위는 넓어져만 갔습니다. 지금은 아주 어린 꼬마 아이들도 나날이 듣고 보는 수많은 영상물 속에서 '지식'이 한껏 넒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치'는 좀처럼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배울수록 나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느낌을 받지만 '가치'는 배우는 데에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또 그것을 배워서 당장 효과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지식'에 집중하지만 '가치'에서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대표적인 가치 교육의 장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공동체부터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집안에서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 연쇄적으로 다른 가치들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학교에서도 가치가 사라지고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던 신앙의 영역에서조차도 가치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점점 더 공공연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성당을 다닌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인간관계의 장으로서 종교적 단체가 존재할 뿐, 신앙적 가치는 갈수록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치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존재하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다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 뿐입니다. 문명의 이기라고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던 많은 것들이 역으로 우리의 내면을 공격해 들어와서 가치를 파괴하는 무기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세상의 진보는 역으로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내적 가치를 올바로 세우는 데에 헌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