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부자가 되려는 이유

돈을 번다는 가정을 반은 농담처럼 상상을 해 보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돈을 벌면 무엇이 좋아지는 걸까요? 돈이 없을 때와 돈이 많을 때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돈이 많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에 여유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사고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즉, 내가 먼거리를 가야 할 때에 기차보다는 비행기가 빠르고, 또 비행기 안에서도 1등석을 타고 반쯤 누워서 갈 수 있게 됩니다. 휴대폰을 사도 최신형 휴대폰을 사서 넉넉한 스토리지 공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여러가지 앱들을 돌릴 수 있겠지요. 휴양지를 가는 것도 아예 통째로 그 휴양지를 사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5성호텔에서 머무를 수 있겠지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가져오는 식단을 즐기면서 테라스 밖으로 나가면 바로 바다가 있을 겁니다. 뭐 저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이 정도 상상해 볼 수 있네요. 하지만 이걸 다 모아보면 결국 처음에 제가 정의한 것이 도출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에 여유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재물로 ‘사물’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처신도 조종할 수 있지요. 돈 많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고 자르고 하는 것 정도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절대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세상 모두를 다 가져도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오직 진실함과 신뢰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사안은, 돈이 결국 ‘영원’을 얻어다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돈많은 바보들은 난치병에 걸려서 돈을 엄청 쏟아붓고는 자신의 몸을 냉동고에 장기간 보관하는 수단을 쓴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극한의 저온으로 냉동된 세포를 해동하면서 그 세포가 파괴되는 걸 막는 기술은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그 사람들 행여나 그 냉동 상태에서 정신이라도 멀쩡히 살아 있다면 그만한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인생의 묘미는 뭘까요?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의 욕구의 실현과 안락을 원하는 마음은 결국 반쪽짜리 행복 추구라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 못하면 모두 굶어 죽는 듯이 상상을 하는데, 실상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가 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삶을 살다가 갑니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부자들은 전체 인류의 불과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지요. 우리는 보통 사람들인 셈입니다.

극도의 빈곤은 벗어나야 하고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기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참된 것을 향해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결국 우리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행복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걸 찾아 나아가야 하는 것이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세상’ 따위는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실상은 내 나약한 영혼이 제멋대로 원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설령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런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도 무시하고 나 혼자 희희낙락하는 것은 아직 남아있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살아보자고 말이지요. 아,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다른 말로 ‘하느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