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두려움에 떠는 이들은 ‘잘못한’ 이들입니다. 잘못하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지극히 단순한 논리입니다.
사람들은 과거 교회가 강한 어투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할 때에 그만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너무 심하게 우리의 잘못을 추궁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설교가들은 설교의 내용을 부드럽게 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예 지옥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있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안에만 해도 누차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영원한 벌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것은 겁을 집어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느님에게 다가올 수 없거든 적어도 하느님 두려워하기라도 제대로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예 듣지 않기’를 선택해 버리고 맙니다. 아예 하느님이라는 존재 없이 살기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정신적 공황은 2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전쟁은 부유한 나라들이 일으키며 문명이 발달한 나라들이 보다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실제로는 그 뒤에 세계의 알력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요.
우리 안에 늘 지녀야 할 두 가지의 길잡이는 한 편으로는 사랑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원한 벌에 대한 거부감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길 가운데에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어 있고, 사랑을 찾아 앞으로 진보하던가, 아니면 악에 머물러 영원의 벌을 스스로 준비하게 마련입니다.
아주 순진한 어린이에게 아무리 어른들의 음탕한 농담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런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지극히 맑은 상태라서 아무리 더러운 단어라도 그 의미조차 들어있지 않은 것이지요. 결국 영원의 두가지 길에 대해서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거부하던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걷고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과거 교회가 강한 어투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할 때에 그만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너무 심하게 우리의 잘못을 추궁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설교가들은 설교의 내용을 부드럽게 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예 지옥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있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안에만 해도 누차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영원한 벌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것은 겁을 집어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느님에게 다가올 수 없거든 적어도 하느님 두려워하기라도 제대로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예 듣지 않기’를 선택해 버리고 맙니다. 아예 하느님이라는 존재 없이 살기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정신적 공황은 2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전쟁은 부유한 나라들이 일으키며 문명이 발달한 나라들이 보다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실제로는 그 뒤에 세계의 알력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요.
우리 안에 늘 지녀야 할 두 가지의 길잡이는 한 편으로는 사랑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원한 벌에 대한 거부감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길 가운데에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어 있고, 사랑을 찾아 앞으로 진보하던가, 아니면 악에 머물러 영원의 벌을 스스로 준비하게 마련입니다.
아주 순진한 어린이에게 아무리 어른들의 음탕한 농담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런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지극히 맑은 상태라서 아무리 더러운 단어라도 그 의미조차 들어있지 않은 것이지요. 결국 영원의 두가지 길에 대해서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거부하던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걷고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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