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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

하느님은 인간을 찾아 오십니다. 드높으신 분이 미천한 존재를 직접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인간이 깨닫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거절합니다. 심지어는 그분이 찾아오셨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생기고 나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많은 돈이 우리 삶에 평안을 가져다 줄 것 같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돈이 필요해서 많은 돈을 가지려는 게 아니라 ‘많이 갖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많이 가지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미묘한 표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여전히 많은 돈을 찾을 것입니다.

돈과 명예, 권력은 모두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요.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것들에게 내어 맡기고 힘을 실어 줍니다.

그런 우둔한 우리들 가운데에 하느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느님은 천둥소리나 번개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주 조용히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떼를 쓰는 자녀 앞에서 푸근한 엄마의 꾸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고, 격정이 가득한 일상 속에서 마음 느긋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찾고 있기에 낮은 하느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볼 여유조차 없지요. 하지만 만일 직장 상사가 뭐든 한 마디를 했다면 귀담아 들었을 것입니다. 그건 생존 수단의 존폐 여부가 달린 문제이니까요. 그러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 육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아주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로 우리를 불러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평화’ 따위는 소용 없어진 지가 오래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투쟁하고 싸우고 다투어야 할 때라고 굳게 믿지요. 그러니 그런 그들을 위해서 그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루카 19,43-44)

왜 이렇게 되느냐구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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