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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일으키는 교사

교리교사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사가 있을 때에는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수순입니다. 그 문제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지요. 여기에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신중하게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 쪽에 치우친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십상이니까요.

그리고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면 그 문제를 일으킨 교사를 따로 만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어쩌다가 그런 것인지,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처신을 생각하고 있는지, 예를 들어 뉘우치고 다시 힘을 내어 볼 것인지 아닌지, 행여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난 뒤에 그에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만일 그 교사의 문제행동이 이런 저런 정황 속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고 스스로 뉘우치고 있으며 앞으로 개선의 희망이 있다면 사제는 다시 힘을 실어주고 함께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반복적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충분히 예상된다면 안타깝지만 그에게 더는 같은 직분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슴이 시리더라도 그가 직분을 내려놓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결정에 있어서 그가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록 직분에서는 제외되겠지만 그것이 교회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교리교사회에서 축출되는 것이 곧 교회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또 그러한 조치를 바탕으로 뒤돌아서서 사제를 모함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을 양심껏 성실히 수행한 사제라면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기꺼이 감내할 마음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상되는 일은 거의 십중팔구 일어나고 맙니다. 문제가 있어서 나간 사람이 밖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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