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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멍에와 짐

그리스도교는 삶의 기본적인 무게감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경감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아무리 성당에서 기도를 해봐야 기말고사 때에 내가 공부한 것 이상의 성적이 나오는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월급이 배로 나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성실히 일한 만큼 성과를 얻게 마련입니다. 신앙이 육체적 질병을 예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가 되면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고 몸은 삐그덕 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가진 ‘장점’은 도대체 뭘까요? 뭐가 좋다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일까요? 신앙이 우리의 삶을 전혀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굳이 ‘믿음’이라는 걸 지녀야 하는 걸까요?

이번엔 관점을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똑같은 음식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곳에서는 사랑하는 연인과 밥을 먹어야 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원수와 밥을 먹어야 합니다. 똑같은 음식인데 한 곳에서는 그 모든 음식이 마치 천상의 음식처럼 느껴지고, 다른 한 곳에서는 그 음식이 지옥에서 밥상을 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외적인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내면의 무엇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신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우리 내면의 궁극적인 변화를 통해서 외적인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 안에 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멍에와 짐’입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지고 가는 사람은 결국 거기에서 비롯하는 내적인 평화를 얻게 됩니다.

주님의 멍에와 짐은 ‘십자가’라고도 표현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원을 내면에 품고,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품은 자가 이 현세의 세상에서 얻게 되는 결과물을 상징합니다. 찰나적인 세상, 지나가는 것에 엄청난 의미를 두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향해 걸어갈 것을 다짐하는 사람은 엄청난 질투와 시기와 증오를 예비하게 됩니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추잡스런 농담을 하는데 영원을 품은 사람이 가서 듣고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오게 되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합니다. ‘성인 났네 성인 났어.’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아줌마들이 계모임을 하면서 온통 자기 자식들 자랑을 서로 늘어 놓는 가운데 한 자매가 자신이 지난 주일에 들은 신부님의 강론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다들 눈총을 주게 마련입니다.

그럼 이게 뭘까요? 안식을 얻는다더니 도리어 힘들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주님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는 이들이 누리게 될 내적인 평화는 오직 그것을 지닌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을 뜯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들은 힘겹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여유를 잃지 않으며 특히 밤에는 아주 잘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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