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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자들

(모든 보좌 신부님들에게 필독을 권장합니다.)

속이는 자가 자신이 속이는 부분을 바로 드러내는 일은 없습니다. 속이는 자는 원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야 드러내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전단계를 꽤나 충실히 실행하지요.

먼저는 호감을 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호감을 사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은 속이려는 대상이 좋아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속이려는 대상이 돈을 좋아하면 돈으로, 헛된 명예를 추구하면 칭찬으로, 신심있는 것을 좋아하면 신심있는 체하며 다가서지요. 정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속이려는 자가 속아 넘어가게 하기 위한 수단을 쓰지요.

다음 단계는 심화과정입니다. 호감을 얻은 이후에는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주 쓰는 방법이 ‘자기 피해자화’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자기 이외의 주변의 채널을 차단하는 방법, 즉 ‘이간질’이지요. 자기 피해자화라는 것은 자신을 불쌍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자신이 피해자이고 그와 더불어 다른 이들은 불쌍한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향한 더욱 큰 관심을 끌어냅니다. 그와 더불어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들은 은밀한 ’이간질’에 얼마나 능통한지 모릅니다.

거의 마지막 단계로는 ‘사건’입니다. 물론 ‘거짓 사건’이지요. 하지만 실제를 바탕으로 한 사건입니다. 이미 속이려는 자의 마음이 거의 넘어온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적은 사실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든 저든 사건이 일어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이는 자들은 자신들이 극도의 피해자이고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은 속아 넘어가고 말지요.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내어주곤 합니다.

아마 지금 현재 당하면서도 모르는 분들이 상당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그가 ‘자기 피해자화’에 능통하다면, 그가 ‘이간질’에 능통하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행여 자신에게 해가 있어도 기꺼이 견뎌내고 말을 삼가는 것이 보통이고, 다른 이들과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워낙 교묘해서 마치 자신은 늘 성인처럼 모든 것을 견디지만 힘들고, 그래서 신부님에게만 특별히 이런 체험을 말씀드리고 나누고자 하며, 나아가 다른 이들과 애써 일치를 찾지만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모나고 나빠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을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는 이런 이들은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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