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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을 드릴 때

누군가에게 배척 당하고 거절 당하는 느낌은 참으로 차갑고 매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절 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철저하게 준비하지요.

무엇을 청하느냐, 누구에게 청하느냐, 어떻게 청하느냐? 이러한 것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에 따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청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살펴야지요. 엉뚱한 것, 죄스러운 것을 청하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엉뚱한 생각이며 죄스러운 것이 이루어진다면 이루어지는 것도 이상한 것이지요. 하지만 어둠은 어둠의 생각을 알고 서로 간의 거래는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청하고 있는지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청을 부탁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부 기관에 가서 뭔가를 청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시골 외할머니에게 뭔가를 청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요. 우리가 청을 드리는 이유는 그 청을 받는 이가 그에 상응하는 권력과 지위가 있다는 말이고, 따라서 그에게 합당한 청을 드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에게 다가가서 펜 좀 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동네 깡패같은 친구에게 배우자가 될 사람을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어떻게 청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두어번 해보고 치워 버리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야 하고 행여 청이 거절 당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여러번 청해보고 실제로 겪으면서 배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 뭔가 바라는 게 있는 사람도 위와 같은 것을 잘 알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고 진실한 것인지 살펴 보아야 하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꾸준함이 있는가? 겸손함이 있는가도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무턱대고 앙탈을 부리다가 제 풀에 성이 나서 하느님에게 대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보면 반역의 자식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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