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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왜 우리의 방향키는 틀어져 버렸을까요?
왜 우리는 하느님을 기억하기 힘들게 되어 버렸을까요?
왜 우리는 우리를 세상의 중심에 두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왜 하느님은 애시당초부터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두지 않으셨을까요?

해바라기가 해가 뜨면 절로 해를 바라보듯이, 우리의 마음 속에도 하느님을 찾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엇나가지 않았을 텐데요.

자유… 왜 자유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까지 허용을 하고, 왜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향한 매력에 사로잡히기보다 세상을 향한 매력에 먼저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수순일까요?

우리가 탄생 직후부터 접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쌓여온 것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스마트폰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누군가가 일순간에 개발한 게 아니라, 꾸준한 과학 기술의 축적과 여러 사람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함축되어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아니 이미 탄생의 이전부터 세상은 미리 그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축적되어 온 인간의 선택이 존재해 온 것이지요.

첫 인간의 죄악이 있고 나서부터는 그 죄악도 나름의 흐름을 형성한 셈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태어나면서부터 ‘원죄’에 물들어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을 이겨낼 수단을 마련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사업이었지요. 그리고 그 일을 교회가 이어서 계속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방향키는 틀어진 채이지만, 그것을 회복할 수단을 하느님은 마련하셨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자신의 뒤틀어진 방향키를 수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의 중심에서 하느님의 중심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일련의 구원 사업 속에서 결국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은 우리더러 죄를 지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준 것임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으로 죄를 짓고는 그 책임을 자유를 선물한 하느님에게 떠넘기려고 합니다.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죄악에 사로잡혀 희망이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인가? 결론은 후자이지요.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선과 사랑과 진실한 평화를 위한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음에도 꾸준히 악의 유혹 속에서 악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시고,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으며, 심지어는 선한 치유약마저도 마련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무책임한 게 아니라 우리가 무책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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