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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사 지도

어제 교사모임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영화를 보았습니다. 창세부터 시작해서 구약을 간단하게 훑으면서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생활, 나아가서 사도들의 활동까지 간략하게 담은 3시간짜리 영화였습니다. 지지난 주에 반을 보았고, 이번 주에 나머지 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끝났고 저마다 감동의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당 안의 불을 켜고는 말을 꺼냈습니다.

“저건 영화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지요. 한 편의 좋은 영화가 사람의 삶을 쉽사리 뒤바꾸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백편을 본다고 해도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지요.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골백번을 배운다고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할 때에 비로소 배우는 것입니다. 인내하라고 배운다고 인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내를 해야 할 상황에서 인내를 실천할 때에 인내를 배우는 것이지요.

교리교사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시기하는 마음을 그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십시오.”

어디든지 공동체가 있는 곳은 곧잘 마음들이 갈라지곤 합니다.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이 빈번하지요. 제가 머무는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교사들 단체별로 소소한 일로 서로 다투고, 증오하고, 나아가서 주임 신부의 관심과 사랑을 더 얻기 위해서 서로 하는 일들을 부풀리고 자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리교사라고 해서 완성된 인격체가 아닙니다. 걸어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이들이지요. 그래서 교리교사의 지도를 맡은 사람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그들의 세상적 요구에만 응답하다보면 세속적인 교리교사단을 만들게 됩니다. 또 반대로 너무 신앙만을 요구하다보면 미흡한 그들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말이 쉽지 이는 저에게도 숙제입니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 저녁에 모임을 가지면서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월요일에는 함께 놀러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껏 실컷 훈육을 시켰으니 당근도 줘야 하니까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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