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샤워기 앞에 서면 고민을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침대에서 금방 나온 따끈한 몸뚱아리가 찬물로 샤워하기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기 순간 온수기를 켤 유혹을 늘 받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도꼭지를 틉니다. 그러면 몸은 거부하지만 이내 그 시원한 물줄기에 도리어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이렇듯 안락을 추구하고 우리의 영혼에 늘 영향을 미쳐 우리의 영혼이 나약해지도록 합니다. 우리가 육의 요구를 끝도 없이 수용하기만 하면 결국 우리는 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영혼이 육신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술만 보면 마시고 싶고, 절제라는 것은 물건너 간 일이 되고 맙니다. 그 밖의 온갖 육신적인 유혹 거리들에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물러지게 되지요.
극도의 고행으로 육신을 상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 이를 인식하면서 육신의 요구를 ‘정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밥을 달라면 당연히 줘야 하지만, 더 맛있는 밥을 달라고 한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영혼을 키우기 위해서는 육신이라는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덩치만 크고 나이만 잔뜩 먹은 어린아이를 내면에 지니게 될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이렇듯 안락을 추구하고 우리의 영혼에 늘 영향을 미쳐 우리의 영혼이 나약해지도록 합니다. 우리가 육의 요구를 끝도 없이 수용하기만 하면 결국 우리는 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영혼이 육신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술만 보면 마시고 싶고, 절제라는 것은 물건너 간 일이 되고 맙니다. 그 밖의 온갖 육신적인 유혹 거리들에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물러지게 되지요.
극도의 고행으로 육신을 상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 이를 인식하면서 육신의 요구를 ‘정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밥을 달라면 당연히 줘야 하지만, 더 맛있는 밥을 달라고 한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영혼을 키우기 위해서는 육신이라는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덩치만 크고 나이만 잔뜩 먹은 어린아이를 내면에 지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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