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익한 수다

어제 아침에 찾아온 자매들이 기억이 납니다. 아침 8시에 약속을 해서 저에게 아침을 가져다 주겠노라고 하고는 아예 반상회를 하고 갔습니다. 덕분에 생일 아침부터 아침상을 푸짐하게 받고 아주 화기 애애하게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아주 조그마한 선물을 들고 오면서 변변치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보세요 자매님. 선물은 그 크기와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예요.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담겨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저에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모임 그 자체예요. 이렇게 기억해주고 찾아와 주는 이들, 그리고 함께 나누는 이 순간이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거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나눠 먹는 이 빵들은 세상의 어느 값비싼 음식보다도 더 소중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음식들에는 여러분들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 자매가 웃습니다. 이어서 나눈 대화들은 참으로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이었지만 유쾌하고 재미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회를 봐서 언제나 그런 삶 안에서 신앙적인 부분을 생각하도록 이끌었지요. 그리고 우리 자매들은 제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만일 한국에서 같은 또래의 자매들이 모여 있었다면 아마 저 같은 어린 주임 신부는 말할 기회 조차도 얻지 못하고 저마다 자식 자랑, 남편 자랑 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애가 편도선이 늘 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알아보니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는 거예요. 하지만 일단은 비타민 C를 구해다 좀 먹이고 프로폴리스로 가라앉히고 하고 있어요.”

“신부님, 저는 애를 어떻게 낳았는가 하면요. 길에서 낳았어요. 그리고 칼도 없어서 마체떼(풀 깎는 남미의 커다란 칼)로 탯줄을 자르고 담요를 조금 찢어서 아이 탯줄을 묶어야 했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는 유까를 갈아서 아이 탯줄 자른 곳에 놓아 독기를 빼내야 했어요.”

“신부님, 아이를 낳는 고통은 여느 다른 고통에 비길 바가 되지 못해요. 극상의 고통이예요. 잇몸이 아픈 건 아주 약과죠.”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유심히 들었지요. 참으로 배울 것들이 많았습니다. 집에 나뒹구는 비타민제를 좀 나눠 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고, 또 필요하다면 조언도 해 주고 했지요.

“왜 성경 말씀에 아이를 낳고 나면 산모는 그 기쁨에 고통을 잊는다고 하잖아요. 저는 남자라서 아이는 낳지 못하지만, 지금 본당에서 하는 일이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다시 하느님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이런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탄생하고 나면 저는 더할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바로 그게 제 기쁨이 될 거예요.”

“신부님, 벌써 열매가 나오고 있잖아요. ㅎㅎㅎ”

“그런가요? 아직 저는 애를 더 많이 낳고 싶은데요? ㅎㅎㅎ 그러니 여러분들이 저마다 공동체에 가셔서 작은 교회를 이루시기를 바래요. 가장 먼저는 여러분 가정부터요. 아시겠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은 지나가고 자리를 마치고 저마다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