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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재주

세상의 재주를 가진 이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악기를 잘 다루고, 사진기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하면 그들을 동경하곤 했었지요. 그러한 그들의 재주가 그들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당시 저의 눈에는 그러한 가치들 외에는 별달리 볼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면의 가치들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그런 재주를 추구하는 이들 안에는 어쩔 수 없이 ‘허영심’이 들어찰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술을 서로 뽐내는 사회에서는 ‘겸손’이라는 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나은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더 낫습니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멍청한 사람 취급을 당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만일 그것이 무너질 만한 것이라면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겸손한 척을 할 수는 있지만 근본 겸손해지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기술과 업적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해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면 됩니다. 어느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습니다. 무려 40년 평생을 바이올린 주법 연구에만 치중해 온 사람이었지요. 헌데 이 사람이 자신의 나라에 전쟁이 나서 남미로 망명을 떠나 어느 가난한 동네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정복을 하고 바이올린을 들고 거리로 나서면 아이들과 사람들이 호기심에 몰려들었지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바이올린의 선율을 즐길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그의 연주복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그가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요상한 물건으로 여기고,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소리를 소음으로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려 40년 평생을 바이올린 하나에만 투자했는데 그 동네는 바이올린과 그 음악이 없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동네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그 두 가치를 돕기 위한 것이니, 우리가 가진 모든 재주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쓰여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교만의 탑을 쌓기 위해서 축적하는 재주라면 훗날 반드시 무너져내리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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