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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조용한 신앙생활

많은 분들이 그릇되이 생각하시는 것이 ‘조용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성당에 조용하게 기도하고 미사드리러 왔지 그런 건 왜 이야기하는거야?’라고 말하시는 분들입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안락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분들입니다.

신앙은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만일 신앙이 우리가 드는 차량 보험의 일종이라면 얼마든지 조용히 머무를 수 있습니다. 차량 보험의 주된 목적은 차량의 손실의 예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량 보험은 보험금을 낼 때와 사고가 날 때가 아니면 꺼내볼 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판공성사, 미사 등등)과 그 신앙이 실제적으로 필요해질 때(만일을 대비해서)가 아니고서는 전혀 나의 일상에 신경쓰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신앙은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신앙은 하느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위해서 나의 온생애를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문제는 지금의 이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에 거대한 강물이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한 방향으로 흐른다면 내가 할 일은 튜브를 차고 강에 몸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노를 저을 필요도 없고 별달리 애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합심해서 나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강의 상류에 있고 강 전체는 유유히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면 적어도 나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 흐름에 저항해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면 나를 도우러 상류에서 오는 배를 만나고 그 배에 올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적합하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따라서 우리가 느긋하게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그렇다고 분별이 되신다면, 이 세상이 참으로 여유롭고 우리가 별다른 노력 없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저 주일 미사나 나오고 교무금이나 꼬박꼬박 내면 원하는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노를 젓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이지요. 즉,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는 오히려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면 말이지요. 수백명의 아이들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백성의 수장과, 이리 저리 변명하기에 바쁜 공무원들과 연예인의 죽음에는 안타까워하면서 정작 자신의 주변에 가장 가까이 고통받는 엄마와 아빠, 아내와 남편의 신음을 듣지 못하는 우리 세대라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는 셈이지요.

우리 시대가 참으로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라면 좋겠습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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