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독서에서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그것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여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악인의 삶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일련의 행위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올바로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교회가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에게 참된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제사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존재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제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우상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비록 모양새는 저마다 다 다를지 몰라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대조되는 것으로 인간의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대변하는 금송아지상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이 꼭 외적으로 형태를 지니고 표현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언뜻 우리 성당은 순례지에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성당을 왔다 가면 '성지순례'를 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예쁜 등나무 소문을 듣고 그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탬프'가 있다는 소식에 와서 도장을 찍고 가기도 합니다. 본디 성지 순례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고 거룩한 곳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보다 잘 배우기 위해서 실행하는 고된 여정이라 '순례'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이름난 가톨릭 문화재를 찾아 소풍을 다닐 뿐입니다. 순례를 통해서 내적인 영적 가치를 얻기보다 수많은 박물관이나 역사관 중에 하나를 다녀온 것에 크게 다르지 않은 나들이를 다닐 뿐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 형태를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신심행위들이 정말 올바른 방향 속에 서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구원을 갈망하는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 여인처럼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가진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저 신앙이라는 것이 딱히 나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고 나를 좀 더 교양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는 장신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언제라도 수틀리면 냉담하고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반응 앞에서 큰 모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막말로 '너는 강아지들을 거르니고 있는 암캐다.'라고 하신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기꺼이 자신의 입지를 굽히고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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