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고 다채로운 주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새방골 성당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출발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수단으로 본당에 오려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는 새방골로 오는 주요 도로를 가르쳐 주거나 네비에 찍을 주소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반면 버스를 타고 오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노선이 있고 내리는 정류장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와룡산을 등산하고 있어서 와룡산 정상에서 새방골로 오는 길을 가르쳐 주려 한다면 전혀 엉뚱한 방향과 엉뚱한 길을 알려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길과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새방골을 찾아오는 법'이라는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뜻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 표현은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생명을 찾는 법,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법, 구원을 얻는 법, 참된 행복을 찾는 법 등등입니다.
그런 가운데 '율법'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그 근본 목적 속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핵심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외적으로는 엄청 다양하고 수가 많고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핵심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외우고 하나도 빠짐없이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이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여전히 올바른 이해를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도 언뜻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늘어난 수많은 외적인 규정들이 때로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흐리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금육을 지켜야 하는데 어떤 고기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찾으면서 도대체 금육을 왜 근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판공이 되어 성사를 보기는 하는데 도대체 고해성사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지를 망각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규정들을 지키면서도 기쁘지 않고 허덕대고 시달리는 느낌입니다. 자연스레 신앙이라는 것도 그 본질의 의미를 뒤쫓아가지 않으니 그저 부담으로만 작용하고 근본 신앙이 필요한 것인지 의심스럽기조차 합니다.
사실 신앙은 꽤나 단순한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지러워진 마음은 이런 저런 핑계거리와 변명거리들을 찾아 '예.' 해야 할 일에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아니요.' 할 일에 '그래도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기가 일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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