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부자에 대한 관점은 바로 그 부로 인해서 비천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세상의 추이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되도록 하고 많이 벌고 많이 쓰기를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에 단순히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마음을 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공기를 소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유함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것에서 분리될 때의 고통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자체에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동 수단으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내 차를 소유한 사람은 그때부터 그 차가 어디 긁히진 않는지 마음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부유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영혼의 능력의 상당 부분을 거기에 투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냥 의미없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지닌 부에 골몰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우리에게는 한정된 자원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삶이라는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의 물질에 골몰하는 동안 그 시간들이 소진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쓸데없는 것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허비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심지어 영적인 것도 '소유'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복음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 나의 경험 목록에 집어넣을 대상이 되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체험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영적 탐욕을 알아 차리시고 그들에게 표징이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눈 앞에 표징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볼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말과 행동이 표징이었음에도 그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버려 두십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소중한 것이었고 그 시간은 말씀에 목마른 이들에게 선물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버려두고 말씀에 목마른 이들을 찾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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