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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 뿐입니다. 그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분명히 베드로 사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되고 외아들의 권능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벽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각 개인은 이런 저런 오류도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 교회는 언제나 올바른 방향을 고수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면 너희들이 약해지고 물러지고 엇나갈 것이니 그때에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노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베드로라는 반석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형제들이 자신들이야말로 교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갈라져 나갔지요.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몇몇 모습에 크게 실망을 느끼고 자신들은 따로 순수한 교회를 만들겠다며 갈라서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류의 시초였습니다. 그렇게 갈라서 나온 교회가 순수할 리가 없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그릇된 이해였지요. 그래서 그 교회는 다시 갈라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 나온 그 교회에도 오류가 생기기 시작하고 그래서 또다른 교회가 자신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갈라지게 된 것이지요. 그 뒤로도 그런 갈라짐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수많은 종파가 탄생하게 된 이유이지요. 저마다 정통성과 순수성을 주장하지만 사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일치하고 있으며 그래서 한국에 있는 사제가 볼리비아 교회에 와서 아무런 문제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전례, 같은 교리, 같은 으뜸 사도를 지니고 있지요.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훗날 교회는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지상에서의 교회의 일...

사목자들을 위한 권고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1베드 5,2-3) 으뜸 사도의 권고입니다. 사목자가 지녀야 할 마음을 잘 적어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양들을 억지로 돌보는 목자들이 있기 때문에 한 권고입니다. 열성 없이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양들을 돌보는 시늉을 하는 목자들이 있기 때문에 한 권고입니다. 양들의 모범이 되지 않고 양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한 권고입니다. 안타깝지만 엄연한 교회의 현실이고 초대 교회 때부터 있어 왔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다시 권고하고 사랑하는 으뜸 사도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형제의 마음으로 다시 권고하고 충고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는 사목자는 자신을 위해 영광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영광을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최고의 열성으로 일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투덜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사목자를 사랑하셔서 더 많은 은총을 쏟아 주십니다. 모쪼록 여러분은 그런 거룩한 사목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 안에 머무르시길 바랍니다.

구약과 우리의 삶

구약성경에는 수많은 전쟁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과격하고 거칠고 잔혹한 내용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요. 하지만 구약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메세지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그러한 장면들이 오히려 부드러운 표현이라는 걸 압니다.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전쟁과도 같습니다. 어둠의 영은 쉴새 없이 우리를 공격해서 무너뜨리려 하고 우리는 그에 맞서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신자인 누군가가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 이웃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유익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고 헛된 생각에 빠져들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맞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 생각에 물들어가게 됩니다. 전쟁에서 지는 셈이지요. 우리가 미사에 들어갈 때에 마치 우리는 거룩한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홀함 하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거룩함을 상실할 수 있게 됩니다. 울려 퍼지는 벨소리와 사제를 향한 험담과 비난과 같은 것들이 우리가 미사에서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은총을 경감시키게 되지요. 우리는 게릴라처럼 잠복해 들어온 세상의 생각에 패배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에 우리는 세속적 사고의 폭풍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올바른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그 안에 숨어있는 온갖 사고들의 침공을 당하게 되지요. 우리는 전쟁에서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영적으로 거룩함과 세속화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구약에서 다루는 장면 장면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장면들의 내적 표현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전쟁으로 묘사해 두었다고 보면 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 거친 공격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남는지, 또 하느님을 벗어난 작은 소홀함이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지요. 구약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읽게 되면 그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유익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

부모와 자녀

육으로만 낳는다고 자식이 아닙니다. 자녀라는 존재는 부모라는 존재의 보살핌을 받는 이들을 자녀라고 합니다. 그 유대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모는 육의 부모이지요. 둘이서 사랑을 하고 그 열매로 자녀를 낳게 됩니다. 물론 자녀는 육으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자녀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육을 돌봄과 동시에 영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의 육만 돌볼 줄 알고 영을 돌볼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자녀들이 내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머지않아 그 내적 엇나감은 외적으로도 드러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제서야 후회를 하지만 이미 늦은 셈이지요. 그러는 가운데 교회 안에는 자녀의 영을 돌보라고 사명이 부여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대부모’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대자녀의 영혼을 돌보는 사명을 함께 나누어 집니다. 물론 세상에 영혼만 절대적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혼과 동시에 필요하다면 육신도 돌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남미에서는 대부모가 그야말로 또다른 부모와 같은 지위를 지닙니다. 법적 지위를 지닌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렇게 인정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제들을 ‘신부’ 즉 영적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의 고귀한 직분을 맡은 이들은 우리의 영적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장상들은 부모의 애정으로 자녀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보살피고 영적인 음식을 먹이고 필요하다면 충고도 해 주어야 하지요. 세상 그 누구도 태어나서 혼자서 크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 육적 혈통을 이어 받았든 아니든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맡은 이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영육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

외아들

사도 신경을 적고 의문나는 점을 적으라고 했더니 한 교리교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외아들 예수라고 하는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 아닌가?” 하느님은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분의 창조물이지요. 하지만 모두 창조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지위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고귀한 창조물이지만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서 멀어져 버렸지요. 인류의 선조는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자녀의 법적 지위를 상실했고 그 자녀들인 우리는 모두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부여하신 아들을 이 땅에 지으셨습니다. 바로 성자였지요. 하지만 성자는 역사 속에서 인간으로 다가오셨지만 실은 이미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모든 권능과 지위를 모두 받았지요.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명’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향해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지요. 가장 큰 권능으로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신 것입니다. 죄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가 겪은 것을 고스란히 겪으셨고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겪으셨지요. 그래서 구세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그분의 구원 사업은 세상적인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루어졌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당신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입양된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입양 절차가 완료되고 나면 온전한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지요. 즉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은 심의기관과 같은 셈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훈련받고 점검받는 곳인 셈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

정말 필요한 것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를 시기했고 교묘하게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도록 인간들의 욕구를 자극했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이 사탄의 덫인지도 모르고 덥석덥석 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지요. 음식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가 고파오고 음식을 구해 먹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필요치 않은 것은 자꾸 먹으려 할 때입니다. 정작 배는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데 엉뚱한 음식 사진이나 음식 소개 프로그램을 보면서 배가 고프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억지로 불러 일으켜진 음식에 대한 욕구로 음식을 과하게 먹고 난 후에 또 살이 찐다고 징징대곤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외적인 모습만을 바라볼 뿐, 실제 일어나고 있는 내적인 모습을 상당수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안에는 온갖 요소들이 접목되어 있고 그 안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찌들어 있는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광고는 자신의 회사 제품을 어떻게든 더 팔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보다는 오히려 과장된 정보를 접하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 제품을 사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홈쇼핑 광고는 그 판매 전략을 위한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홈쇼핑 광고는 마치 인간의 정신을 향한 약물처럼 우리가 보는 것들을 모조리 사고 싶어하게 만들지요. 우리의 욕구는 과장된 것이며, 이는 욕구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음식, 성, 출세, 명예와 같은 욕구들은 거의 대부분 과장된 채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요. 인간은 자신에게 적합한 욕구가 있으며 그것은 합당하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기를 쓰고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조용한 곳에 머물러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챙겨보도록 하십시오. 그럼 의외...

신앙과 영혼

바람을 채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물을 소쿠리에 담을 수도 없지요. 소리를 눈으로 들을 수 없고, 냄새를 귀로 맡을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수용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을 통해서 나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과 하느님을 지성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지성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학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 박사를 따고 교만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고, 수많은 영성 강좌를 듣고도 여전히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신앙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담아야 하고 그 이전에 굳은 결심으로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담기는 곳은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우리의 영혼 안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의지가 들어있지 않은 행위에는 사랑이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반대의 경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그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의지가 포함되지 않은 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어른이 아이의 손에 칼을 쥐게 하고 그 팔을 강제적으로 휘두르게 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문들은 어떻게든 인간의 의지적 선택을 경감시키려고 온갖 학설을 끌어들입니다. 툭하면 유전자에서 기인한다고 하고, 툭하면 심리적 질환이고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 인간의 의지적 부분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진정한 변화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곤 합니다. 과거에는 심리학이라던지 유전자학이라던 것이 없었습니다. 반면 신앙이 더 활성화 되어 있었고 더 순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볼리비아 시골에 가 보면 문명의 이기는 없지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땀흘려 일하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