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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것을 얻기

무엇이 기쁜 일일까요?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면 기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원했고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을까요? 어린 시절 저는 장난감이 그토록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가격이 엄청났고 내가 받는 용돈이라는 것은 겨우 동전 몇 푼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댄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로 장난감 가게에 가서 그토록 사고 싶던 기차를 샀습니다. 기뻤지요. 그렇게 원하던 걸 손에 넣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기쁨이 거짓 기쁨이었던 것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이 사라진 걸 안 부모님이 눈치를 채게 되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내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장난감 기차가 나에게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부모님은 어찌된 일인지 물었고 죄악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길에서 돈을 주웠다고 거짓말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나에게 쏟아지게 되었지요.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는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것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구할 정당한 수단을 강구하도록 하시지요. 장난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을 구할 정당한 수단이 없는 이상 참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순히 세상 것만을 원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것을 원하고 얻고를 반복해 가면서 그러한 것들이 결국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는 체험을 확고히 하고 그 뒤로부터는 보다 드높은 가치를 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실과 정의, 사랑, 용서, 인내와 겸손과 같은 가치들이지요. 어린 시절의 생존 본능에 따른 우리의 기본 욕구에서 조금씩 벗어나 영적으...

영적 의사

자기 상처를 건드린다고 ‘나쁜 의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사탕 발린 말을 하면서 정작 치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만 뜯어가는 의사를 나쁜 의사라고 할 것이지요. 하지만 영성적인 면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정으로 치유할 마음이 있는 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피하고 반대로 자시들의 귀에 달가운 말만 해 대면서 정작 아무것도 내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이를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환자가 치료를 하지도 않은 의사를 분별하려는 것부터가 재미난 일입니다. 환자는 병이 다 낫고 나서야 그 의사가 정말 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치유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단순히 자신의 느낌만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해 버리고 거리를 두니 치유는 커녕 병은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의지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기 싫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에 관계된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세상에 물들어왔으니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익숙하고 쉬운 일입니다. 헌데 그런 습관에 사로잡힌 우리가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두고 기도를 시작하려면 엄청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를 영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하고 흔히 하는 말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이키는 행위를 말하지요. 의지를 쏟아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영적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단 낫고 나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니 그 다음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개선되고 나면 마치 우리가 전에는 패스트 푸드 음...

목자의 사랑

사랑받으려는 마음은 아주 정상입니다. 하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하기에 슬픔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 다른 사랑을 갈구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사랑은 모두 한계점을 지니고 있지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밖의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상이 하느님과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인간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에게 다가가 직접 그분의 사랑을 수액을 받아 마시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추상적인 설명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길은 좁고 온갖 난관이 가득한 길이라 걸으려 하는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사랑에 주린 영혼을 채워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느님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도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이들은 막연히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찾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에 더욱 상처받는 것입니다. 목자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목자를 통해서 다른 여느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가 사랑을 뿜어주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목자에게서 남다른 사랑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제에 대한 사랑의 기대치가 큰 이유입니다. 사제가 적어도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사랑이 오염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사랑 한다는 핑계로 ‘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랑의 기대치가 역으로 작용해서 목자를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랑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 사랑이라는 것도 늘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요. 하물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은 그 한계점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언뜻 상대를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한 선을 긋게 됩니다. 특히나 상대가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매력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선은 더욱 확고하게 드러나지요. 상대의 미모가 좋았다거나 상대의 성격이 좋았다거나 상대가 가진 특정한 장점 때문에 매력을 느껴 다가온 사람은 그 매력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정반대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매력을 지닌 다른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마음이 그리로 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상대에게 좋은 성격을 기대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상대가 모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을 사는데 일부러 값 떨어지고 못난 상품을 구입할 멍청이는 없으니까요. 그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을 고르는 셈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돈의 한계도 바라보는 것이지요. 악마는 이런 그의 약점을 알기에 그것을 파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매력을 느낄 것을 언제나 눈앞에 제시하지요. 그것을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혹은 사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우리 내부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사탕으로 꼬실 수는 없습니다. 사탕을 간절히 바라기에 사탕을 주면서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면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언제나 세상적인 어떤 매력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지요. 사람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는 곳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

롯 이야기

롯의 이야기는 죄악이 가득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의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의인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죄인들이 가득한 그 고장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가는 같이 재앙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미련을 남기면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화염이 떨어진다거나 누군가가 소금기둥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넓힌다면 비슷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요. 어느 공동체가 그릇된 선택을 하고 그 방향성이 도저히 수정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의인을 살리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물론 의인은 그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이미 최선을 다 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도 의롭지 못하며 나아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신경질만 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는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십니다. 그에게 천사를 보내 다가올 재앙을 경고해 주시지요. 이 초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고 어느 사람을 계기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의인은 보다 참된 길을 찾기 위해서 여정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사실 수많은 성인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모두 성인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성인들은 하느님만을 바래서 나아가고자 했고 사람들은 그런 성인들의 모습을 무시하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요. 그런 방해 속에서도 성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때가 다가오게 되면 성인은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자신의 길을 가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이는 이 세상에서 특수한 사명을 ...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달콤한 사탕이 아닙니다. 쓴 약이고 사람을 살리는 약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대변됩니다.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본질에 접근해 갈수록 저항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과 공동체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의 시기는 얼마 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고 시간이 갈수록 공동체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게 됩니다. 죄인들의 공동체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지요. 아마 시간이 더 흐른다면 더 많은 오류들을 관측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환상도 깨어져가게 마련이지요. 사제나 수도자의 뒷담화를 듣기 시작하면 상당히 진전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별로 세부적으로 다르긴 하겠지만 전체 줄기는 비슷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사실 하느님이 모르시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복음 구절에서 여러가지로 이에 대한 말씀을 남겨 두셨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청소를 할 수도 있지요. 결국엔 저마다 자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을 적용하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 책임이 아니다’며 떠나기를 선택하지요. 그러는 동안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청소다’라며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떠나는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다른 더러움입니다. 사실 교회 안의 문제는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의 단편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그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보다 강하고 영리한 사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아직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청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점점 더 덜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더 힘든 청소를 도맡을 수 있게 되지...

주님의 인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사도 12,7) 때로는 인생 행로에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막막한 지점에 이르는 체험을 합니다. 잘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틀어막히는 것이지요. 사업이 실패한다던가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이럴 때에는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형제는 순교를 당하고 자신은 감옥에 갇히고 수갑을 차고 더는 오고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든 구속에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해야할 일과 따라갈 길까지 하나하나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베드로에게는 아직 남은 사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를 늘 보살피십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구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에 충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설령 더는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에게 쓰임새가 있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나를 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잔뜩 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내가 이룩하기를 원했던 것을 잔뜩 해 온 터라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에 그 누구에게도 희망을 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면 행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엾게 보시고 구해 주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