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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랑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 사랑이라는 것도 늘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요. 하물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은 그 한계점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언뜻 상대를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한 선을 긋게 됩니다. 특히나 상대가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매력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선은 더욱 확고하게 드러나지요. 상대의 미모가 좋았다거나 상대의 성격이 좋았다거나 상대가 가진 특정한 장점 때문에 매력을 느껴 다가온 사람은 그 매력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정반대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매력을 지닌 다른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마음이 그리로 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상대에게 좋은 성격을 기대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상대가 모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을 사는데 일부러 값 떨어지고 못난 상품을 구입할 멍청이는 없으니까요. 그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을 고르는 셈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돈의 한계도 바라보는 것이지요.

악마는 이런 그의 약점을 알기에 그것을 파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매력을 느낄 것을 언제나 눈앞에 제시하지요. 그것을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혹은 사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우리 내부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사탕으로 꼬실 수는 없습니다. 사탕을 간절히 바라기에 사탕을 주면서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면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언제나 세상적인 어떤 매력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지요. 사람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는 곳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한 매력을 추구하는 두 사람의 욕구가 서로 부딪히게 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참된 그리스도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바로 이 흐름에서 전혀 엉뚱한 길을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전하는 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이지요. 이들은 하느님의 선과 진리와 사랑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들이 간절히 추구하던 것에서 마음을 점점 떼어놓기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악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이들은 그 어떤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평화에 시기심을 느끼고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바오로 사도의 이전 삶처럼 자기 스스로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전히 수행한다고 생각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엇나가 있고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사랑하는지,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련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더욱 굳건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기 때문이지요. 견디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들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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