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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내면

돈을 많이 가졌다고 남을 자동으로 도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집에 쌓인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그것으로 남을 돕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집에 가진 건 없어도 남을 도울 마음이 가득하다면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을 돕게 마련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의 ‘형식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사를 다 받았다고 특정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고 그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자동으로 구원이 예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성사의 은총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세례성사를 받은 이라면 자신의 새로 태어난 삶을 실제로 살아야 하며, 성체성사를 모시는 사람이라면 에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타인들에게 내어 주어야 하며,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영적 성장의 은총, 성령의 은총을 받은 대로 남에게 그 은총을 통해서 봉사해야 하며, 혼배성사를 받은 이라면 그 성사의 은총대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배우자를 열렬히 사랑해야 하고, 성품성사를 받은 이라면 그 특별한 은총 속에서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이끌어야 하고, 고해성사를 받은 이는 그 용서의 은총으로 다른 이들의 허물도 용서해야 하며, 병자성사를 받은 이라면 영원의 희망에 가득 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방향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외적 형식을 완료했다고 자동으로 계단을 올라서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아이가 깨끗이 세탁된 옷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옷에 더러움이 묻을 때마다 스스로 세탁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씀씀이가 어디를 향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의 이기적 특성으로 모든 외적 형식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정말 내가 배우고 들은 것을 열심히 실천할 마음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꾸르실료를 아무리 열심히 수강해도 청년 성서 모임을 아무리 완수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이들을 많이 보았으니 그들은 신앙을 생활화 하기 위해서 그런 과정을 수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차수가 몇 차이며, 새로운 차수가 탄생할 때마다 가서 자신이 선배 차수임을 은근히 내세우고 자만심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들이 받은 교육이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아무리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한들 다른 영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그 가르침이 어떤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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