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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쓰임새

어떤 연필이 최고의 연필일까요? 고급 마크가 적힌 것? 화려한 지우개가 달린 것? 색상이 화려한 것?

연필은 그것으로 최고의 작품이 나올 때에 비로소 최고의 연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아무리 화려한 연필이라도 그것이 제 쓰임새 대로 쓰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과연 그 본래의 쓰임새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달리 생각하기에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쓰임새를 찾아서 열중합니다. 누군가는 최고의 미모를 지향하고, 누군가는 최고의 인기와 권력을 갈구하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의 쓰임새는 인간을 만드신 분의 목적에 따라 쓰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참된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제멋대로의 제 뜻을 쫓아가다가 결국 멸망해버리지 않도록 하느님은 인간에게 길을 가르치셨지요.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창조목적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이는 ‘고통’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돈을 조금 더 벌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들에게 희생을 통한 사랑의 가치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열렬히 갈구해서 얻는 그 즉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바람을 잡는 행위처럼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에 이미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리는 허황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가 믿는 희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같이 살아가면서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공허한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그들 자신도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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