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밥을 먹어도 행복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여가 활동을 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행복이 얼마 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지요. 그리고 내가 행복을 느끼는 그런 요소들이 파괴될 때에는 이전에 누리던 행복에 비례하는 만큼의 불행을 느낀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면 행복한데 시련이 닥쳐올 때에는 불행합니다. 그것이 기본 구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긴 한데, 그것이 지속될 수 없고, 이내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밀어닥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이전에 누리던 행복만큼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이지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배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고,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고, 게임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쳐질 때에도 여러분은 다른 차원의 행복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그 안에서 ‘행복’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세상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지만 그것의 본질이 ‘허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그것은 금속과 플라스틱의 조합에 불과하며,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결국 늙고 죽고 나면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허락되면 우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그것을 즐길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머무르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잃을 때에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뭐길래 우리가 늘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초로 죽음에서 일어난 분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의 가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어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면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기에 ‘신앙인’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세상의 요소들로 행복할 수 있는 근간에는 ‘생명’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차도 집도 미모도 소용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헌데 지상의 삶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살아갑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는 막연한 신뢰, 공허한 신념 속에서 살아가지요. 그러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불안정한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에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고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그 본연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 근본적인 ‘행복’에 관한 관념의 차이가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가르는 척도가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은 자신에게 정당하게 허락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그 이면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에도 준비된 자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행복관을 검증해볼 수 있기 바랍니다. 과연 여러분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요?
즉,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면 행복한데 시련이 닥쳐올 때에는 불행합니다. 그것이 기본 구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긴 한데, 그것이 지속될 수 없고, 이내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밀어닥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이전에 누리던 행복만큼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이지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배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고,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고, 게임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쳐질 때에도 여러분은 다른 차원의 행복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그 안에서 ‘행복’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세상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지만 그것의 본질이 ‘허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그것은 금속과 플라스틱의 조합에 불과하며,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결국 늙고 죽고 나면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허락되면 우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그것을 즐길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머무르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잃을 때에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뭐길래 우리가 늘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초로 죽음에서 일어난 분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의 가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어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면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기에 ‘신앙인’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세상의 요소들로 행복할 수 있는 근간에는 ‘생명’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차도 집도 미모도 소용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헌데 지상의 삶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살아갑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는 막연한 신뢰, 공허한 신념 속에서 살아가지요. 그러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불안정한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에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고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그 본연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 근본적인 ‘행복’에 관한 관념의 차이가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가르는 척도가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은 자신에게 정당하게 허락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그 이면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에도 준비된 자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행복관을 검증해볼 수 있기 바랍니다. 과연 여러분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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