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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오늘은 은근히 만나는 사람이 많네요. 면담도 하고 고해도 하면서 또 새롭게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의 ‘과거’로 남지요. 그리고 때로 우리는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그릇된 선택은 과거의 ‘오점’으로 남게 되지요. 그러나 결국은 전체 그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과거의 오점을 많이 남겼다 하더라도 늦게나마 마음을 돌이켜서 참되고 거룩한 것을 찾으면 변화는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변화의 핵심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만 찾고 쾌락만을 찾다가 어긋난 길을 걸으면 훗날에는 반드시 그 길을 후회하게 됩니다. 이는 제가 매일 매일 관찰하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어둠의 길은 막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는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그 행동을 구체적으로 행할 때에 그 사실을(자신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담배를 피지 않는 친구에게 장난 삼아 권한 담배가 그를 중독자로 만들고 결국 그가 폐암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도하기를 권하고 곁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기도를 함께 하여 그가 그 기억을 바탕 삼아 훗날 하느님에게 돌아와서 결국 영원을 얻게 되면 우리는 그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고 미흡한 행동은 모두 나와 타인에게 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고 이웃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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