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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중요성

우리의 일상의 행위는 마냥 초라해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상을 헛되이 보냅니다.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위대한 일은 하나씩 준비되어 온 것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슈퍼 히어로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 충실히 준비되어 온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쳐다보던 군중들 중에 한 사람이 용감하게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헌데 그가 나오면서 씩씩대며 하는 소리가 “누가 나 등떠밀었어?!!!”라고 했다지요. 그냥 피식 거리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여기에도 생각해 볼 거리는 존재합니다. 그가 등을 떠밀린 것은 ‘계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헌데 그는 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 올 정도의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그런 일상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 역시 빠져 죽고 말았겠지요.

우리의 일상은 튼튼한 기반을 마련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무엇에 신경쓰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가는 것이지요.

매일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수다를 떨고 공연한 일에 시간을 보내면서 어쩌다 찾아간 성체조배실에서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상을 온통 어지러운 소음으로 채워 놓았으니 성체 앞에 가서 일시적으로 침묵한다고 해서 그 침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미사에 참례해도 자꾸 분심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향한 공경과 갈망을 일상 안에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 미사를 가도 평일 미사를 가도 맹숭맹숭한 느낌일 뿐입니다.

오히려 반대인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술자리를 갈망하는 남성들은 늘 그런 자리를 물색하고 기회를 만들려고 하지요. 배가 고파서 음식을 찾는 게 아니라 보다 새롭고 감각적으로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여성들은 언제나 그런 종류의 소식을 갈망하고 뭔가 더 새로운 것이 없나 찾습니다. 일상 안에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내면에 그러한 것들이 쌓이기 시작하게 됩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나를 형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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