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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장의 딸과 우리의 영혼

회당장의 딸의 이야기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회당장의 딸은 죽어있다시피 한 우리의 영혼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때로 내면이 공허하고 마치 죽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큰 죄에 빠져 있거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러한 느낌을 받지요.

그러한 때에 회당장 딸의 아버지는 주님을 찾아갑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우리의 몸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데려갑니다. 습관이고 버릇이 된 셈이지요. 비록 내면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살리고자 하는 막연한 마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아버지, 즉 우리의 몸이 주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엉뚱한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 같습니다.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삽입된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건드렸지만 그 누구도 주님의 은총을 얻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었던 그 여인만이 주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지요. 매 주일마다 수많은 이들이 성당에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은총을 얻는 이는 오직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 뿐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수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의 기회가 열려 있고 또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실 기회가 열려 있지만 결국 주님의 용서를 얻고 은총을 얻는 이는 간절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사실 거의 다 구경꾼들일 뿐이지요.

주님이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다시 길을 가려는데 사람들이 와서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자고 하지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도착을 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소위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이의 죽음을 슬퍼한답시고 사람들이 모여 와서 온갖 소란을 피우고 있었지요. 이에 예수님은 아이가 아직 죽은 게 아니라고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빈정댑니다.

이는 고해성사 앞에 선 우리 내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 어유!!!! 부끄러워!!!!! 어떻게 고백을 할려고 그래? 수치스럽게? 네 영혼은 이미 회복 불가 상태라구.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이왕 나쁜 짓 한 거 그냥 그대로 살라구. 뭐하려고 그걸 회복하려고 해? 네 영혼은 이미 죽어 버렸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가서려고 할 때에 우리의 내면은 온갖 분란을 일으키지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 제자(베드로; 믿음의 상징, 야고보; 희망의 상징, 요한; 사랑의 상징)를 데리고 결국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들어가서 일어나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잡고(인격적 만남) 말씀 한 마디로 일으키십니다. 고해소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제는 고해자를 앞에 두고 사죄경으로 그의 죄를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지요.

하지만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십니다. 새로이 깨어난 영혼은 배가 고픕니다. 영혼은 그에 합당한 양식을 먹어야 하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몸을 받아모시는 거룩한 식탁인 성체성사, 즉 미사의 식탁입니다. 죽었다 깨어난 아이는 이 양식을 먹어야 다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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