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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곧잘 어딘가에 틀어 박혀서 고리타분한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천만에요. 그런 외적인 모습은 그런 특수한 소명을 받은 이들의 몫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각자의 소명 안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의 모습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사정없이 구타하면서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지요.

그럼 저마다의 삶의 모습이 각자 다른데 우리는 누구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과연 무엇은 허용이 되고 무엇은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제가 올바로 산다는 모습과 직업을 지닌 신앙인이 올바로 산다는 모습은 서로 다를진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하느님이 뜻에 맞는 모습이란 말입니까?

사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누가 롤 모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역시도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한계와 유다 지방이라는 공간적 한계 속에서 드러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다시 문제가 제기됩니다. 과연 누가 진리의 영을 지녔는지, 누가 성령을 지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진리의 영을 지니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분별 기준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따라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바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른 위험성이 제기됩니다. 양심은 무디어질 수 있다는 것과 ‘속이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그릇된 행실에 따라 처음의 그 순수한 본성에서 점점 무디어져 간다는 것이고, 그런 우리의 엇나감을 부추기는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대두됩니다. 교회라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는 곧 교계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줄기이지요. 교회는 전체 구성원을 말합니다. 신부 혼자 어딘가에 파견되어 있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부는 사람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의 구성원들은 오류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전체 교회는 그 방향성에서 틀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무류성(오류가 없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교황의 무류성이 등장합니다. 교황이 개인적으로 제멋대로 행할 가능성도 존재를 합니다. 하지만 교황이 교황좌에서 전체 교회의 신앙에 대해서 선언하는 발언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유구한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재기해서 신앙인들의 영적 도움을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교회에 진리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가 꾸준히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보다 참된 진리를 위해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시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언제나 함께 머무르실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순명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옳바르고 맞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우리에게는 미흡한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말 양심에 정반대되는 것을 요구한다면 마땅히 거부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고 미묘한 견해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면 순명이라는 덕목이 요구됩니다. 전체 공동체와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이는 언젠가는 엇나가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몸이 감염되어서 아플 수 있지만 팔 한 쪽이 자신은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고 떨어져 나간다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그 팔입니다. 몸이 아픈 것을 알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다시 그 몸을 낫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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