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여러분들 중에 적지 않은 분들이 실제로 겪는 어려움은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교회의 구성원들에게서 겪는 어려움들이지요. 교회 내 같은 활동(교리교사 성가대), 반모임이나 레지오를 하는 이들과의 불화, 그리고 사목자 또는 수도자와의 반목과 같은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교회를 등지는 이들도 많지요. 뭔가 힘을 얻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으려 왔는데 정반대로 상처받고 힘들어서 나가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면 아마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고 타인의 그릇됨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낼 것입니다. 일단 그런 경험이 있고 나면 ‘교회’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다른 종교를 선택해 버리기도 하지요.
과연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맘에 들지 않는 모든 이들을 갈아치우고 나면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 것일까요? 인성이 올바르지 못한 사제와 수도자를 갈아치우고 본당 안에서 텃세를 부리는 이들을 싹 새로운 인물로 갈아치우고 나면 뭔가 바뀌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부족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성인이라도 어딘가는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하 건 우리의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연민’의 마음과 더불어서 ‘신비적인 고찰’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올바로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내가 그리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언제라도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그 인식으로 상대의 오류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 역시 한 인간이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신비적 고찰’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단순히 우리 인간들의 활동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근본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 인간의 엇나간 정신 너머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 눈 앞에 드러나는 수많은 오류들을 보다 인내심을 갖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행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통 화가 잔뜩 난 상태로 교회에 대한 비방거리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동조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정의는 없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욱 어두움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셈이지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서 기도해주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도 모자랄 판에 공연한 증오에 힘을 빼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정의를 위한 추구인지 증오의 표출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어둠에 빠지기 시작한 사람이 빛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이르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내면의 노력이 필요하듯이 이들도 한번 그런 길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 길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오류가 많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 일은 더욱 꼬여만 갈 뿐입니다. 서로 싸우는 두 사람은 갈수록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폭력적으로 변해갈 뿐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희생하고 참아 견디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지요. 싸우는 둘은 서로를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저 감상하라고 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 인해서 교회를 등지는 이들도 많지요. 뭔가 힘을 얻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으려 왔는데 정반대로 상처받고 힘들어서 나가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면 아마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고 타인의 그릇됨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낼 것입니다. 일단 그런 경험이 있고 나면 ‘교회’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다른 종교를 선택해 버리기도 하지요.
과연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맘에 들지 않는 모든 이들을 갈아치우고 나면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 것일까요? 인성이 올바르지 못한 사제와 수도자를 갈아치우고 본당 안에서 텃세를 부리는 이들을 싹 새로운 인물로 갈아치우고 나면 뭔가 바뀌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부족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성인이라도 어딘가는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하 건 우리의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연민’의 마음과 더불어서 ‘신비적인 고찰’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올바로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내가 그리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언제라도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그 인식으로 상대의 오류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 역시 한 인간이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신비적 고찰’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단순히 우리 인간들의 활동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근본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 인간의 엇나간 정신 너머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 눈 앞에 드러나는 수많은 오류들을 보다 인내심을 갖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행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통 화가 잔뜩 난 상태로 교회에 대한 비방거리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동조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정의는 없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욱 어두움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셈이지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서 기도해주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도 모자랄 판에 공연한 증오에 힘을 빼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정의를 위한 추구인지 증오의 표출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어둠에 빠지기 시작한 사람이 빛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이르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내면의 노력이 필요하듯이 이들도 한번 그런 길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 길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오류가 많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 일은 더욱 꼬여만 갈 뿐입니다. 서로 싸우는 두 사람은 갈수록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폭력적으로 변해갈 뿐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희생하고 참아 견디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지요. 싸우는 둘은 서로를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저 감상하라고 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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